신학생 실습활동으로 간 임자도경성성서학원의 학생들은 학습과 실습을 병행하는 방법으로 학업을 이수해야 했다. 6개월은 학교 수업을 듣고, 나머지 6개월은 현장 실습으로 교회를 개척하거나 전도활동을 하는 체계였다. 이러한 두 축으로 된 학제를 통해서 당시 학생들은 대부분 수업이 없는 기간에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서 전도활동을 하고 교회공동체 모임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문준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전도왕’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열심을 넘어 특심으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기에 학교의 이러한 제도는 문준경
목포교회에서의 이성봉 목사의 사역이성봉 전도사가 목포교회에 와 보니 자그마하고 비좁은 셋방 교회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전도하고 심방, 가정 집회, 구역 집회를 인도하며 하루도 쉴 새 없이 활동을 이어 갔다. 또한 이 전도사는 교회당 건축을 위해 유달산에 올라가 기도와 찬송을 시작했다. 청신기도단을 조직하여 어두운 새벽에 청년들과 함께 유달산에 올라가 이 지역의 영혼들과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 응답은 1년 만에 이루어져 교회 성도들과 미국의 어느 성도의 후원으로 총 50여 평의 교회를 짓게 되었다. 이성봉 전도사는 목사
뜻하지 않았던 도움으로 기숙사생이 되다기도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가는 문준경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했다. 밖으로 나가자 햇살이 반겨 주었다. 햇살도 감사한데, 성서학원 마당 한가운데로 고향 교회 이성봉 목사님이 걸어오고 있었다. 문준경은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여 인사를 드렸다.“안녕하세요, 목사님. 여긴 어쩐 일이데요. 여기서 목사님을 뵈니 시방 너무 반갑구만요.”“문 집사님, 그동안 잘 지냈어요? 공부는 할만합니까? 문 집사님, 열심이라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기도로 늘 중보하고 있습니다.”고향 교회 이성봉 담임
좌절된 이혼사건문준경은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으며 이전보다 성경을 더 깊이 알아 갔다. 사역자들이 신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청강생이라는 자신의 신분이 신학생으로서 얼마나 불리하고 어려운 것인지 절감하며 계속 힘든 상황을 맞이하였다. 청강생은 기숙사 입학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도 자비로 충당해야 했다. 즉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을 견디어 나가야만 했다. 사실 문준경의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었다.신학생 문준경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신이 정식
샬롬!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문안인사 드립니다.2023년도 이제 다 지나가버리고 새해가 다가왔습니다. 저희 과테말라 선교지의 소식을 SNS 페이스북 페이지에 계속 올리고 있지만, 인터넷사용이 편하지 않으시거나, SNS를 하지 않으시는 분들도 있으시니, 이렇게 지면으로도 계속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페이스북 페이지의 QR 코드를 다시 공유 드립니다. 멀리 각처에 계신 기도의 동역자 여러분들과 더 자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가족들과 가장 행복한 성탄절 보내셨길 바라며, 2024년 새해에는 영육의 강건함
집사에서 신학생이 되다문준경 집사는 교회에서 ‘전도왕’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고, 주변 동네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전도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당시 매우 보수적인 시대에 여성이 이 동네 저 동네 활발하게 다니면서 전도하는 일에는 적잖은 애로사항이 따랐다. 그럼에도 여성으로서 전도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녀의 친인척들의 도움이 있었다. 목포에서 큰 숙박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던 오빠와 신안군과 목포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던 작은아버지 집안, 특히 작은아버지는 선박업에도 관여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될 때마
김응조 목사를 만나다 문준경 집사의 전도활동은 나날이 왕성해졌다. 고향에 갔다 와서도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러던 중 생계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재봉틀이 다르게 보였다. “그렇지. 이거야!”이때부터 문 집사는 생각나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삯바느질을 더 열심히 했다. 전도할 때 쓰이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전도를 하려고 밖으로 나가서 주변 사람들을 만나 보면 하나같이 안타까운 사정이 있고, 도와야 하는 일들이 태반이었다. 필요한 것들을 사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였
목포교회에서의 장석초 목사장석초 전도사가 목포교회에 와서 사역할 초창기에, 문준경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설교는 목포 교회 성도들에게 체험적 신앙과 말씀에 철저한 순종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오늘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 잘 들으시기 바라오. 지가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하갔소이다. 지는 과거에 첩도 데리고 사는 아주 형편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거리를 걷다가 찬송 소리가 들려서 지도 모르게 교회당에 들어가 설교를 들었는데, 그냥 까닭 없이 눈물이 마구 흘러나왔지라. 그리고 그
목포교회에 다니는 문준경문준경은 그 여인을 만나서 결심한 후 목포교회로 갔다. 목포교회는 오늘날 북교동성결교회의 전신이다. 문준경은 난생 처음 교회라는 곳에 가서 설교자의 설교를 들었고, 함께 부르는 노래가 찬송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좁은 집 안에만 있다가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활달한 성격의 문준경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그동안 맺혀 있던 한스러운 감정과 공허했던 마음이 가라앉게 되어 교회생활이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를 통해 듣게 되는 성경 이야기는 문준경에게 새로운 삶의 소망을 일
증도를 떠나 목포로문준경은 더 이상 증도에 남을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 생활 20년 동안 정씨 집안이 있었던 증도 등선리와 증동리는 평생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의 곁에는 남편도, 아껴 주시던 시아버님도, 마음을 쏟은 문심과 태진이까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문준경은 친정 부모님이 그리웠다. 그렇다고 고향 암태도 친정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혼한 여자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올 경우,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릴 모습을 상상하기도 싫
전북 김제시 죽산면 대창리는 번드리라 불리기도 한다. 번드리는 드넓은 마을의 논에 물이 꽉 차면 멀리서 볼 때 번들번들하게 보였다 해서 생겨난 이름이며 대창리는 이곳이 큰 곡창 지대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1894년 일어난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쫓기던 동학교인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며 기독교인이라며 주장하면 석방되었기에 기독교로 집단으로 개종하기도 하였다.전킨(W.M.Junkin 한국명 전위렴) 선교사가 1897년 김제 송지동교회에 이어 1900년 입석리교회(월성리교회)를 세웠고, 대창리의 이순명 이기선 최학성 최학삼 최
둘째 아내의 아이를 받다병세에서 회복한 문준경은 남편에 대한 작은 소망도 이제는 스스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그녀는 시부모님만을 봉양하면서 이 시기를 견디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문준경은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문준경은 남편을 차지한 여자인 둘째 부인을 “작은 댁”이라고 불러 주었다. 얼마 후 작은댁 소복진이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문준경은 만삭이 되어 괴로워 하는 작은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동이 힘든 작은댁을 위해 방에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해 주었다. 서운한 마음도
결혼 초기남편 정근택은 결혼 이후에도 늘 바쁜 생활을 하였다. 증도와 목포를 오가면서 생활했기에 한 달에 2~3일 정도만 집에 들를 정도였다. 신부 문준경은 사업으로 인해 바쁜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참고 또 참았다. 그러나 남편의 빈자리가 더해 갈수록 문준경의 마음은 외로움으로 가득차서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지경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그러한 며느리를 보면서 안타까워했다.“아가야, 이 녀석이 오늘도 안 오려나 보다. 너무 기다리지 말고 오늘은 그냥 쉬어라. 조금 있으면 올끼다. 조금 더 참아 보자.”“야, 아버지
어린 문준경은 청소년 시기를 지나 어느덧 만 17세의 처녀로 성장 하였다. 집에서는 혼기를 놓칠세라 시집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결혼은 여느 규수들과 같은 방식으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하는 양 집안끼리의 정략결혼이 일반적이었다.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오면서 결국 아버지는 지도면 증동리에 사는 정기운 씨 집안과 사돈을 맺기로 하고 정씨 집안 삼남인 정근택 군과 결혼시키기로 정하였다. 양 집안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었던 지주들이었다. 이때가 1908년 3월 18일이었다.17년 동안 살던 암태도 고향을 떠나 이제까지 한번도 가 보지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오늘날 암태도를 홍보하는 안내를 보면, ‘의로운 농민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암태도’라고 소개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소작쟁의가 성공하여 소작인 항쟁 기념탑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소작쟁의는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진행되었고, 소작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암태도 소작쟁의의 영향으로 전라남도 도서지방의 소작쟁의가 도초도와 자은도와 지도로 번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작쟁의는 성공하지 못했다. 암태도에서 소작쟁의는 20년 전부터, 즉 1904년부터 크고 작은 소작쟁의
부봉교회는 병마에 시달리던 이수목(1871~1952)은 집에서 5㎞ 거리의 면 소재지 산인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인이 됐다. 이수목은 1906년에 고향의 전답을 내놓아,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에 교회를 세웠다. 이수목 영수의 신앙은 존경받는 신앙이었다.전정희 논설위원(국민일보)에게 동네에 연세 많으신 분이 말하기를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이수목 어르신은 진짜 믿음의 사람이었오. 새벽마다 빠지지 않고 추운데 목욕하고 기도를 하였소.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때 무지개가 떴고 발인할 때 쌍무지개가 떠올랐던 것을 동네 사람 모두가 보았소.
문준경(文俊卿) 전도사가 태어난 곳은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이다. 암태(巖泰)라는 말은 큰 바위란 의미에서 그 이름의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또한 돌이 많은 섬에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현재 암태도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해 있고, 2개 읍과 12개 면 가운데 암태면에 위치한 섬이다.암태도 수곡리는 섬 중심에 위치한 가장 큰 산인 승봉산 자락에서 흐르는 물이 풍성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1760년 해남에서 이주해 온 장택 고씨에 의해 시작되었고, 1770년대에는 남평 문씨 문경행, 17
충남 논산시 성동면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순박했던 농촌 마을은 공산세력에 의해 핏빛으로 물들여져 피를 토하는 아픔과 증오가 쌓여있었다. 성동면에서 주민 수백 수십명이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촌성결교회, 우곤감리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복음으로 정전(停戰) 70년이 지난 지금도 용서와 치유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1950년 7월 23일 논산시를 장악한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내세워 소작인들의 민심을 얻는듯 했으나 이내 본색을 드러내 모든 농작물을 강제로 빼앗아 갔으며 폭행과 살인을
송계순은 인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호탕한 기질에 천하장사였고 노래도 잘해 친구가 많았던 호걸이요 유명한 싸움꾼이었다. 그는 당시 가장 험악한 집단이었던 광산의 일군들을 부리는 십장을 거쳐 십장들을 거느리는 광산 도(道) 십장이 되어, 곡괭이와 삽으로 광산권을 폭력으로 뺏고 광산을 지켜주는 전문 도십장으로 전국 광산의 제왕이 되었다.한번은 황해도에 광산 도십장으로 일을 할 때 황해도 감사가 초청하여 갔더니, 버선발로 달려 나와 맞으며 환대하고 제발 큰 사건만 일으키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한다. 송계순은 자연히 술, 노름
국제구호개발 NGO 굿피플(회장 최경배)은 연말을 앞두고 ‘아나바다 시장놀이’수익금 전액을 기부한 경기도 용인시 또래마을 어린이집에 ‘좋은 학생, 좋은 기부’ 현판을 전달했다고 3일 밝혔다.또래마을 어린이집 7살 슬기반 원아들은 지난 12월 연말을 앞두고 선물을 받는 대신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좋은 학생, 좋은 기부’ 캠페인에 참여했다.원아들은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물건 3점과 3천원의 돈을 가지고 ‘아나바다 시장놀이’를 진행했다. 원아들은 물건을 판매해 경제 활동을 직접 체험하고, 모금된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