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고향과 문씨 집안 (2)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

오늘날 암태도를 홍보하는 안내를 보면, ‘의로운 농민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암태도’라고 소개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소작쟁의가 성공하여 소작인 항쟁 기념탑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소작쟁의는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진행되었고, 소작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암태도 소작쟁의의 영향으로 전라남도 도서지방의 소작쟁의가 도초도와 자은도와 지도로 번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작쟁의는 성공하지 못했다. 암태도에서 소작쟁의는 20년 전부터, 즉 1904년부터 크고 작은 소작쟁의가 일어 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는 문준경 전도사가 13세였던 시기였다. 암 태도 소작쟁의가 한국농민운동역사에 의미가 있는 것은 쟁의를 통해 소작인들의 주장이 관철되었다는 점이고, 이 일이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암태도 소작인 항쟁 기념탑
▲암태도 소작인 항쟁 기념탑

문씨 집안은 암태도 소작쟁의의 한가운데 서 있는 당사자였다. 문준경 전도사의 작은아버지 문재철은 암태도의 지주로서 많은 농경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암태도에서 문씨 집안을 상대로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시기는 문준경 전도사가 31세 정도일 때였는데, 아직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았던 시기였고, 결혼생활을 하는 시기였다.

▲암태도 청년회장 박복영 기사
▲암태도 청년회장 박복영 기사

암태도 소작쟁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1923년 암태소작인회가 조직되었다. 서태석이 조직한 소작인회를 암태면 청년회가 더욱 조직화하기 위해 1923년 12월 2일 박복영을 대표로 하는 100명이 암태 보통학교에 모며 암태소작회의 발대식을 가졌다. 1924년 2월 20일 소작인들은 소작료 논 4할, 밭 3할로 저감할 것과 지주가 거절할 때는 소작료 불납동맹 및 폐작동맹을 하고 지주송덕비를 파괴할 것을 결의했다. 그 당시 문재철은 여러 곳을 관리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결국 큰 손해를 감수하고 1924년 8 월 30일 소작인회 대표 박복영과 약정서를 체결하여 소작인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였고,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문준경의 작은아버지 문재철은 한때 친일파 명단에 오르기도 했지만, 후손들은 당시 일본의 강압적인 정책과 압력 때문에 지주들이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현실 문제였다고 항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문재철은 청년회장 박복영을 통해서 상해임시정부의 정치자금을 도왔는데, 벼 200가마, 보리 100가마, 누룩 50통에 달하는 거액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는 독립투사였던 청년회장 박복영에 대한 기사에서 확인되고 있다. 박복영은 신간회에 관여하면서 솜 장수로 가장하여 상해임시정부를 위한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에피소드

문준경 전도사는 진사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비교적 유복한 생활 가운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적극적이었다. 성격은 밝고 명랑해서 주변 분위기가 어두울 때면 기지를 발휘해서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꾸어 놓곤 하였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면 꼭 곁으로 다가가서 열심히 배우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옷이 터지면 직접 고치고, 동정도 달아 보기도 했던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릴 때부터 문준경 전도사는 마음씨가 착했다. 집안의 일꾼들도 어린 문준경을 “마음씨 고운 주인댁 따님”이라고 부르면서 착한 마음을 인정했다. 어느 날 어린 문준경은 무더운 여름 따가운 햇빛 아래에서 커다란 나뭇단을 머리에 올려 나르는 동네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무척 힘들어 보이고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할머니, 힘드실 텐데 어서 그 짐을 저에게 주세요.”

“아니다. 햇볕이 뜨거우니 그늘에 가서 놀기나 해라. 니가 무슨 힘이 있어서 이 짐을 진단 말이냐?”

“할머니, 일단 짐을 내려놓고 쉬세요. 제 친구들하고 같이 나르면 돼요.”

할머니는 어린 준경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하면서 조금 쉬고 가려고 짐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준경은 놀고 있던 친구들과 짐을 나누어 할머니 댁까지 옮겨 드렸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준경을 동네 친구들도 좋아해서 준경의 말이라면 금방 동조했던 것이다.

어린 문준경은 동네 남자아이들이 부러웠다. 왜냐하면 남자아이들은 서당에 가서 글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어린 문준경은 글을 배우러 가는 오빠를 몰래 뒤쫓아 가서 밖에서 글을 배우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문준경이 열 살이 되던 무렵이었다. 그날도 서당에 쫓아가서 문 틈으로 안을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훈장님이 자리를 비워 훈장님 자리가 비게 되었다. 어린 문준경은 용감하게도 훈장님 자리에 앉아 글을 배우고 있는 남자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글을 배우고 싶었던 마음을 쏟아내듯 자신이 훈장인 것처럼 글을 가르치는 흉내를 내었다. 갓을 쓰고 곰방대로 글씨를 가리키면서 뭐라 뭐라 설명했다. 남자아이들도 재미있었는지 아무도 말리지 않고 마냥 즐거워했다.

당시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들 모습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당시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들 모습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그렇게 훈장 흉내 내는 놀이를 하면서 한참을 재미있어 하고 있는 데, 자리를 비운 훈장님이 갑자기 들어오고 말았다. 너무 재미있어서 훈장님이 들어오는 소리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 가 혼이 날 줄만 알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엄한 훈장님이 꾸중하기는커녕 귀엽고 재미있어하며 웃고 계신 것이 아닌가!

“너는 누구 집 딸이냐?”

“네, 지는 ‘문’ 자, ‘재’ 자, ‘경’ 자, 문재경 씨의 셋째 딸입니다.”

“그럼, 니 이름이 뭐냐?”

“네, 지는 문준경이라고 합니다.”

“허허, 그런데 어떻게 나를 봤다고 그렇게도 내 흉내를 잘 내느냐? 참 신통하구나.”

“글을 배우고 싶어서 자주 서당에 왔습니다. 서당 밖에서 훈장님 소리도 듣고 안을 엿보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훈장님은 정직하게 답변하는 어린 준경의 대답에 만족하며 꾸중 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어린 준경은 훈장님에게 글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건네지 못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준경 전도사의 아버지 문재경 씨는 유교적 사고가 강하였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는 여자의 사회적 활동을 금지시키고,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이 여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은 글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유교사회에 성행하던 남존여비(男尊女卑) 의 오랜 관습 속에서 아버지 문재경씨는 딸의 글공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문재경 씨뿐만 아니라 섬마을 어느 집도 딸들의 글공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훈장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온 후부터 어린 문준경은 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 다. 어린 준경은 지나가는 동네 어른들의 말을 주워들을 때마다 육지나 바깥세상의 일들에 대한 소식을 더 많이 알고 싶었고, 직접 글을 읽어서 그 정보를 얻고 싶었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근대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문호가 개방되고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부터다. 1883년 당시 정부는 귀족층의 아이들에게 근대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육영공원’이라는 근대식 서구 학교를 세우게 되는데, 여기에 헬리팩스, 길모어, 벙커, 헐버트 선교사가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 학교는 부정부패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편 19세기 말엽 대한제국은 감리교 여자 선교사 스크랜튼(Mary Fletcher Benton Scranton)의 교육활동으로 근대적 여성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1886년 5월 여학생 하나로 시작한 여학교(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가 1909년에는 학생 수가 174명으로 증가하였다. 유교 전통의 제약에서 탈피하여 여성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새로운 사회로 전환하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학교가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했고, 배재학당, 정동여학교, 숭의여학교 등이 근대식 교육을 전개해 나간 곳이었다.

암태도와 가까운 목포에서도 근대식 교육이 전개되고 있었다. 1903년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에서 정명여학교를 설립하면서 근대식 교육이 시작되었다. 스트래퍼(Fredrica Elizabeth Straeffer, 서 여사) 여자 선교사는 목포에 1903년 목포여학교를 시작하였고, 이 학교가 정명여학교로 발전하였다. 목포남학교는 여학교보다 조금 일찍 시작했다. 이 두 학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에서 가르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 공포와 ‘사립학교규칙’을 통해 모든 사립학교에 대해서 국가 표준 교육과정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1914년 목포남학교는 ‘사립목포영흥 학교’란 이름으로 인가를 받았고, 목포여학교는 ‘사립목포정명여학교’란 이름으로 허가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학교들을 ‘영흥학교’와 ‘정명학교’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어린 문준경이 있었던 암태도는 아직 근대식 교육을 꿈꿀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유교식 교육이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 가운데 육지에서 여성들이 교육을 받는다는 얘기는 전혀 체감할 수 없었다. 어린 문준경은 당시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는, 시대에 앞서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여자로 태어났지만, 자신도 평등하게 교육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교육받고 싶어 했던 자신의 마음을 계속 억눌러 왔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마음에 가득한 말을 쏟아 내고 말았다.

“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어서 들어오너라.”

어린 문준경은 조금 주저하다가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아버님, 지도 오빠들처럼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글을 모르니까 너무 답답하기가 그지 없지라. 옛날에도 양반 집안의 여자들은 글을 배웠다고 하던데, 여자로 태어났다 해도 알아야 할 것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님, 제발 지도 글을 배우게 해 주세요.”

이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었다.

“내가 이때까지 보살펴 주고 밥 먹여 주면서 편히 키웠건만, 무슨 말이냐? 니가 지금 애비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이래라 저래라 할려고 그러냐? 여자가 살림이나 잘 배워서 시집가 남편에게 잘하고 가정에 충실하면 되지, 무슨 다른 할 일이 있어서 그러냐? 다시는 이 애비 앞에서 글 배운다는 엉뚱한 말을 꺼내지도 말거라. 어서 니 방으로 물러가라.”

열네 살의 문준경은 아버지의 불호령 앞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암담한 심정으로 어렵게 말씀드린 간절한 첫 소원이 무자비하게 무시되는 경험이었다. 큰 실망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여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기도 하고, 흐르는 눈물을 참았다. 결국 어린 문준경은 다른 집 여자아이들과 같은 모습으로 평소 어머니를 도우며 집안일들을 익혀 나갈 수밖에 없었다.

까만색 고무신, 까만색 치마, 흰 저고리, 단발머리의 복장이 그 당 시 문준경의 모습이었다. 바느질하는 어머니 곁에서 열심히 따라 하면서 배웠다. 낮에는 낫을 들고 산으로 가서 땔감 나무를 구해 왔고, 물이 떨어졌을 때는 양동이에 물을 받아 오기도 했다.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 김을 매고 농사일을 도왔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고유 명절 때에는 차례 상 차리는 법을 배우고, 저고리나 옷을 미리 만들고 준비하는 방법도 익히면서 살아갔다. 그러나 섬마을 여성들의 고달픈 일상에도 막간의 시간은 있었다. 청소년 문준경은 어머니의 일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돕다가 짬이 날 때면 동네 아이들과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오재미놀이도 하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섬마을 여자아이들은 글을 배우는 것을 엄두도 못 내고, 목포에서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글을 배우고 신문명의 지식을 익히고 있는 자신과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 저 이 아이들은 집안 노동을 거들면서 결혼을 준비해 나아가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내용입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