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사명자의 길을 가다(4-1)

집사에서 신학생이 되다

문준경 집사는 교회에서 ‘전도왕’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고, 주변 동네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전도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당시 매우 보수적인 시대에 여성이 이 동네 저 동네 활발하게 다니면서 전도하는 일에는 적잖은 애로사항이 따랐다. 그럼에도 여성으로서 전도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녀의 친인척들의 도움이 있었다. 목포에서 큰 숙박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던 오빠와 신안군과 목포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던 작은아버지 집안, 특히 작은아버지는 선박업에도 관여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될 때마다 문 집사에게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작은아버지의 배를 교인들과 함께 탔을 때 모든 교인들의 배삯을 면제받거나, 목포에 사는 오라버니로부터 적잖은 돌봄을 받았던 점들이다. 이러한 도움은 문준경 집사가 비록 여성이지만 사람들의 인심을 얻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문 집사의 활발한 전도 활동에는 늘 찬양이 있었다. 그녀는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끄는 은사가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지나다닐 즈음에 적당한 자리를 골라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어느 여인이 길거리에서 노래를 하니까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보다가 그 목소리가 곱고 아름다워서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새찬송가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 받으며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예수 앞에 나와서 은총을 받으며 맘에 기쁨 넘치어 감사하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예수 앞에 설 때에 흰 옷을 입으며 밝고 빛난 내 집에 길이 살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새찬송가 369장

죄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아멘.

여러 사람들이 모여 찬양하는 자신을 주목하고 있을 때,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복음을 전하며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문 집사는 성경말씀을 전하면서도 스스로 늘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평신도로 전도하기보다는 이제 말씀을 잘 배워 보고 싶었다.

성경을 잘 배워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헌신하여 죽을 때까지 말씀을 전하는 말씀의 사역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시아버지로부터 배운 한글 때문에 성경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그 말씀을 깊이 헤아릴 수 없었기에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말씀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옵소서.”

문 집사의 기도는 어느덧 신학생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되었고, 사역자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가득 채워졌다. 문 집사의 기도는 2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목포교회는 다시 새로운 목회자를 맞이 하였다. 김응조 목사가 다른 임지로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김응조 목사는 다시 건강이 회복된 이후, 목포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고 이 부흥의 역사는 전남 지방은 물론 전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목포교회에 부임한 지 2년이 채 안 된 시점인 1931년 3월에 대전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사역을 위해 목포교회를 사임해야만 했다. 이에 목포교회는 세 번째 사역자를 맞이 하였다. 성결교의 세계적인 부흥강사,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은 이성봉 목사였다. 당시 이성봉 목사는 아직 목사 안수를 받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는 목포교회를 시무하면서 1932년 4월 1일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성봉 전도사가 목포교회 담임 교역자로 부임한 한 달 후, 문 집사는 2년간 기도해 온 신학교 입학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931년 5월 5일 이성봉 전도사는 문준경 집사의 성서학원 입학추천서를 작성하여 상경하는 문 집사에게 주었다. 문 집사는 앞날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가득 안고 서울로 향했다.

정식 신학생이 아닌 청강생이 되다

문준경 집사는 이성봉 전도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서울 충정로 아현동에 위치한 경성성서학원에 도착했다. 경성성서학원 건물은 당시 서울에서 매우 높은 곳에 위치한 고층건물이었기에 장안의 명물이었다. 이 신학교는 단독 건물로는 해방 전까지 가장 큰 건물이었다. 그 외관은 빨간 벽돌로 올려져 있었고, 웅장하고 아담했다. 마당은 좁았지만, 예배당과 건물의 모습은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밝은 미소와 경쾌한 웃음소리는 그녀가 평소에 생각했던 신학교 이상의 모습이었다. 앞으로 여기 있는 신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릴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마음이 설레었다.

▲1921년에 신축된 경성성서학원 건물
▲1921년에 신축된 경성성서학원 건물

그녀는 가져온 추천서를 꺼내어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원장 이명직 목사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이명직 목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자, 문준경 집사는 조심스 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지는 이번에 입학 지원한 문준경 집사입니다.”

“어떻게 해서 성서학원에 지원하게 되었나요?”

“네, 지는 1927년 3월에 한 여인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 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4년이 되 었는데, 그동안 장석초 목사님, 김응조 목사님, 이번에 새로 오신 이성봉 전도사님의 영향을 받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는 전도자로 평생을 살고 싶어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성봉 전도사님의 입학추천서는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이지 스데반 집사와 바울 사도처럼 일평생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네, 지는 남편이 있지만 함께 살지 않고, 남편이 둘째 아내와 살고 있어서 사실상 혼자입니다. 교회에서는 집사로 열심히 전도하면서 목회자 사역을 돕고 있습니다.”

“혼자라면 좋지만, 남편과 같이 살지 않더라도 남편이 있는 한 받 아 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지금은 집사님을 찾아오지 않지만, 나중에 마음이 변해서 찾아오면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문준경 집사는 이명직 목사의 이러한 설명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찾아온 문준경의 마음은 마치 낭떠러지에서 추락할 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긴급하고 애절한 마음이 되었다.

“아니구만요. 원장님, 지는 절대로 하나님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 당께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구만요.”

원장은 경성성서학원 입학 자격 조건을 보여 주면서 다시 차분하게 설명하였다.

“여기 입학 규정집에 보면, 입학 자격은 25세 이상 30세 이하의 청년 남녀 중 보통 상식이 있고 믿음이 강건하여 확실히 거듭난 경험과 명백한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자에 한한다고 나옵니다.”

문 집사는 ‘청년 남녀’라는 규정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라면, 진짜루 지는 안 되는 겁니까? 지를 받아만 주신다면 고향 수많은 섬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이 한목숨 바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소명과 각오를 이명직 목사에게 애원하면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명직 목사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 지…. 그동안 간절히 기도했던 2년의 시간, 이성봉 전도사님의 추천서를 받고 너무나도 기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순간…. 그러나 한 쪽에서 드는 생각은 ‘나 같은 것이 무슨 신학생이 될 수 있겠어? 여기서 그만두어야 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이 함께 뒤엉키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드디어 이명직 목사가 말을 건넸다.

“집사님, 제가 집사님의 말씀을 들어 보니 더 이상 만류할 수 없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공부해 보는 것으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입학 규정을 고치면 다른 학생들에게 형평성의 문제가 생겨서 곤란합니다. 그러니 정식 학원생이 아니라, 청강생으로 공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청강생으로도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사명을 이어 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문 집사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지옥에서 천당으로 가는 느낌이었다. 정식 신학생은 아니지만, 이곳에 와서 성경말씀을 배우고 함께 신학교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다.

“네, 감사합니다. 원장님,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경성성서학원은 학생들을 구분하여 원비생, 자비생, 청강생 제도를 구비하고 있었다. 입학 후 2개월 동안은 자비 부담이고, 이 기간 동안 소명감이 없거나 신학생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입학을 취소시켰다. 그러나 이 기간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정식으로 원비생이 되고, 학비는 동양선교회 후원으로 해결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경성성서학원은 신학생 양성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었다. 문 집사는 청강생 자격으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경우였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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