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사명자의 길을 가다(4-3)

뜻하지 않았던 도움으로 기숙사생이 되다

기도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가는 문준경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했다. 밖으로 나가자 햇살이 반겨 주었다. 햇살도 감사한데, 성서학원 마당 한가운데로 고향 교회 이성봉 목사님이 걸어오고 있었다. 문준경은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여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여긴 어쩐 일이데요. 여기서 목사님을 뵈니 시방 너무 반갑구만요.”

“문 집사님, 그동안 잘 지냈어요? 공부는 할만합니까? 문 집사님, 열심이라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기도로 늘 중보하고 있습니다.”

고향 교회 이성봉 담임목사와 문준경 집사는 햇살이 비치는 한낮 성서학원 마당 한쪽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서로에 대한 반가운 마음을 나누고 대화를 이어 갔다.

“목사님, 지가 시방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한 경험을 했구만요. 정말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예배당에 들어가 원망으로 기도하고 있는디, 갑자기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서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셨구만요.”

문 집사는 기도한 이유와 기도 가운데 경험한 신비한 체험, 그 결과인 지금의 상태를 이성봉 목사에게 상세히 설명하면서 간증했다.

“하나님이 문 집사님의 기도를 들으셨군요. 감사하게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가 문 집사님에게 임하신 거예요. 그런데 문 집사님이 그런 기도를 드릴 정도로 공부하는 환경이 어려우셨어요? 저에게 말씀했 어야죠.”

이성봉 목사는 문 집사의 그동안의 청강생 생활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문 집사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주님 앞에서 철없던 자신의 불신앙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머뭇거리는 문 집사를 보면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장 성서학원 건물로 들어가 원장실로 발길을 향했다.

“원장님 계십니까?”

▲성서학원원장인 이명직 목사(좌측)와 이성봉 목사(우측)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성서학원원장인 이명직 목사(좌측)와 이성봉 목사(우측)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아이고 이 목사님, 이곳에는 어쩐 일입니까?”

이명직 목사는 이성봉 목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원장님은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네, 별일 없이 주님의 은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로 이렇게….”

“원장님, 우리 교회 집사님 잘 아시죠? 문준경 집사님이 여기서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서울에 온 김에 알아보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실은 제가 성서학원에 들어오려고 할 때 방금 문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문 집사님이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사실은 그 집사님이 어려운 생활을 하시는가 봅니다. 아까 저에게 찾아와서 기숙사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정이 매우 딱하지만, 그 집사님은 남편이 있어서 규칙상 원입생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도 고민거리가 되었는데, 정말 안타깝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저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는 이명직 목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확신 있는 눈빛으로 말하였다.

“원장님, 그러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네? 무슨 부탁일까요?” “원장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문 집사를 원입생으로 받아 주십시오. 문 집사의 남편은 죽어도 문 집사를 찾지 않을 사람입니다. 제가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지요. 원장님, 규칙에는 예외도 있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우리 하나님이 쓰시려고 세운 훌륭한 집사님의 앞길을 규칙 때문에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 원장은 이성봉 목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명직 원장은 규칙에 발목이 잡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결정을 미루고 있었는데, 이성봉 목사의 말을 통해 막힌 것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원장실을 나온 이성봉 목사는 문준경 집사에게 다가가 그녀가 사명의 길을 계속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독려해 주었다. 문 집사는 말하지 않아도 이성봉 목사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기도한 문제가 그날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기숙사에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었고, 원입생으로 새로운 신학생 생활을 하게 되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명자의 마음을 다시 강하게 만드시고, 모든 어려운 환경도 바꾸어 주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여 사명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계속 훈련하고 계셨다.

기숙사 왕언니 생활

기숙사로 들어간 문준경은 그곳에 있는 여학생들 가운데서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나이 어린 여학생들이 문준경을 왕언니로 생각하고 문준경의 방에 자주 가서 이야기를 풀어 놓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기숙사 사감은 자신에게 찾아와야 할 학생들이 문준경 집사에게 찾아가는 것이 난감했다. 그러한 현상은 규칙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문준경과 학생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환기시키고 주의를 주었다.

그렇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음 문제도 있었지만, 엄격한 생활 규칙이 완화되고 질서가 흐트러질 수 있기에 사감은 염려했다. 그러나 사감도 이러한 현상을 계속 막지 못하고 이를 허락하게 될 정도로 문준경은 학생들을 성숙하고 지혜롭게 인도했다. 문준경의 방은 ‘사랑의 방’으로 통했다. 그곳을 찾는 학생들마다 마음에 사랑을 듬뿍 받아 갔다. 그래서 학생들은 문준경의 방문에 아예 ‘사랑의 방’이라는 문패를 달아 놓았다.

문준경은 어린 학생들이 찾아오는데 오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듣노라면 어린 학생들에게도 각자 나름의 형편과 사정이 많았다. 그것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어떠한 모양으로든 학생들을 도왔다.

하루는 어느 여학생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막 울었다. 왕언니 문준경은 자초지종을 물었다.

“왜 그러니? 무슨 일 있어? 진정하고 말해 봐.”

그 학생은 문준경 품에서 한참을 격하게 울고 난 후, 입을 열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에게 어머니가 홀로 계시는데요, 어머니 혼자 남겨 두고 여기서 공부하는 것이 맞는지 늘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전보가 왔는데,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거예요. 우리 엄마 고생만 하다가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지 제가 너무 몰랐어요. 저는 엄마 고생만 시킨 불효자식이에요. … 빨리 여비를 마련해서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텐데 서울에는 연락되는 친척이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신학교 기숙사에서 어린 신학생을 상담해 주는 문준경
▲신학교 기숙사에서 어린 신학생을 상담해 주는 문준경

여학생의 눈에서 떨어지는 굵은 눈물이 끊임없이 바닥에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문준경은 어린 여학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같이 울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곧바로 어떻게 할지를 궁리했다. 문준경은 여학생에게 잠깐만 있으라고 하면서 아끼고 있던 손재봉틀을 들고 나갔다. 그것은 문준경이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생계수단과 같은 것이었다. 얼마 후에 다시 돌아온 문준경은 손재봉틀을 전당 포에 판 돈 100원을 가지고 왔다.

“학생, 거절하지 말고 받아 줘. 여기 100원이 있어. 이 정도면 여비 외에도 어머니 병원비까지 해결될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빨리 고향에 가서 어머니 보살펴 드려.”

“아니, 집사님, 이렇게 많이 주시면 어떻게 해요. 저는 집에 갈 여비만 있으면 돼요.”

“괜찮아, 이것 가지고 내려가서 어머니 위급하시니까 빨리 도와 드려. 고향에 내려가도 돈 구해야 할 텐데 이 돈 가지고 가면 당장 병원에라도 빨리 갈 수 있당께. 시간 지체하지 말고 이것 가지고 어여 가! 어서!"

그 여학생은 큰언니처럼 챙겨 주는 문준경을 껴안고 감사해하며 고향길을 재촉했다. 아마도 그 여학생은 평생 문준경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준경은 이렇게 남을 도와주어야 할 일이 생기면 아무리 절약한 돈이어도, 결코 그 돈이 아깝지 않았다. 혹시라도 돈이 없을 때면, 문준경은 가지고 있는 물건을 팔아서라도 도와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아끼던 병풍은 전당포에서 영영 다시 찾아 오지 못했다. 이러한 문준경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은 “만날 남 도와주다 정작 자신이 거덜 나면 어떻게 하려고 하냐”며 핀잔을 주었다. 문준경은 주변에서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으니 괜찮다고, 부자라고 하면서 상대방을 안심시켰다.

문 집사는 가난하지만 자신의 전 재산인 동전 두 개를 바친 과부를 늘 기억하고 있었다. 진정한 구제는 돈이 있고 넉넉한 형편에서만 하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깨닫고 있었다. 이것은 장석초 목사에게 배운 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만물의 창조자가 나의 아버지라는 믿음 가운데 부요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마음껏 구제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 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25). 

문준경의 멘토 이성봉 목사

이성봉 목사가 목포교회의 세 번째 목회자로 부임할 때에는 전도사 신분이었다. 그는 목포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곧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그가 담임목회자로 처음 부임한 날은 1931년 3월 25일이었고, 한 달이 넘어가던 5월에 문준경 집사가 신학교 청강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성봉 목사는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태어난 이 북 출신이었다. 그는 장남으로서 6세 되던 해에 어머니 김진실 씨의 신앙생활이 시작되면서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성봉의 청소년 시절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가정 형편상 소학교는 간신히 마칠 수 있었으나, 중학교에는 진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그에게 상급학교 진급이 좌절된 상황은 너무나도 큰 상처였다. 그래서 그는 삶을 비관하면서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면학의 꿈이 사라진 소망 없는 삶은 그저 하루하루 돈벌이에 연연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가는 삶이었다.

그가 생계를 위해 했던 일은 마부 생활이었다. 그는 그 일을 하면서 담배와 술에 빠지고, 화투, 주전, 노름도 하였다. 교회에도 출석하는 정도로만 나가면서 세상에 빠져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자식을 보며 신앙적으로 권고하고 혼내기도 했지만, 이미 다 커버린 자식을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하나님께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날마다 기도하였다.

▲29세의 이성봉 전도사
▲29세의 이성봉 전도사

그러던 어느 날 이성봉은 교회 예배를 드리지 않고 친구들과 남의 집 과수원 과일을 훔치다가 다리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 통증은 가라앉지 않고 골막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져 다리를 잘라야 할 상황까지 맞이했다. 열과 통증으로 먹지도 못하는 그에게 죽음의 어두움이 덮이고 있었다. 이성봉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인생의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서 깨닫기 시작했다. 결국 이성봉은 하나님 앞에서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후, 이성봉은 1925년 25세의 나이로 경성성서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학교도 나오지 못했지만, 당시 경성성서학원은 추천제 입학이었기 때문에 감리사의 추천을 받아서 간 것이었다. 신학교에서 이성봉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아직 맺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부흥회를 할 때마다 어릴 때부터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해 내서 회개하곤 했다. 신학생일 때 그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부흥회에 자주 쓰임받게 되었다. 청량리교회 주일학교에서 섬기고, 여름방학에는 성경학교를 열어서 어린이 신앙성장에 앞장섰다. 그리고 1928년에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후 그는 바로 수원에 교회를 개척하도록 파송받았다. 그 당시에 이성봉 전도사는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목회 현장에서 많이 체험했다. 그중에서도 무당이 예수 믿고 회개하여 모든 우상 물건을 불 태운 사건은 유명한 일화다. 그 무당은 신자 강정식 씨의 건너편 방에 있었고, 그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점을 쳐 주고 있었다. 하루는 이성봉 전도사가 강정식 씨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무당이 설교를 듣고 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무당은 옆방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이성봉 전도사에게 찾아와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서 기도를 받았다. 7개월 동안 아팠던 자신의 몸이 기도를 받은 다음 날 깨끗하게 나아서 주일에는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신자가 된 그 사람은 이전의 우상 제물과 기물들을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 불에 태우고,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하였다.

이성봉 전도사가 수원 사역을 마치고 목포교회로 오게 된 것은 김응조 목사가 대전 감리사로 가게 되어, 목포교회에 후임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이성봉 전도사는 교단으로부터 파송을 받아 1931년 3월 25일에 목포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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