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결혼 생활(2-2)

결혼 초기

남편 정근택은 결혼 이후에도 늘 바쁜 생활을 하였다. 증도와 목포를 오가면서 생활했기에 한 달에 2~3일 정도만 집에 들를 정도였다. 신부 문준경은 사업으로 인해 바쁜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참고 또 참았다. 그러나 남편의 빈자리가 더해 갈수록 문준경의 마음은 외로움으로 가득차서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지경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그러한 며느리를 보면서 안타까워했다.

“아가야, 이 녀석이 오늘도 안 오려나 보다. 너무 기다리지 말고 오늘은 그냥 쉬어라. 조금 있으면 올끼다. 조금 더 참아 보자.”

“야, 아버지, 저는 괜찮은지라.”

그때 친정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여자는 시집가서 남편에게 사랑받고 시부모님 모시고 잘 살면 그것이 최고지.”

문준경은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 보였다. 시집와서 남편과 함께한 시간이 적으니 자꾸 친정 생각만 났다. ‘이러한 나의 처지를 엄마가 알면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실까?’ 마음이 저미어 왔다. 준경은 마당에 소여물을 주면서 소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소야, 소야, 너는 내 사정을 아느냐? 남편이 있어도 같이 살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독수공방으로 지새워야 하는 내 신세를 알고 있느냔 말이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내 사정을 너는 아느냐? 남들이 다 시집을 가니 나도 시집가면 잘살 줄 알고 시집을 왔더니 이게 웬일이더냐. 날아가는 새들도 다 지 짝을 찾아 평화롭게 지저귀는데, 나는 과부도 아니고 벙어리도 아니면서 이 신세가 웬 말이냐.”

이렇게 신세타령을 하다가도 문득 어릴 적 고향 생각에 잠겼다. 어릴적 동네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재미있게 놀았던 일, 언니, 오라버니들과 깔깔대며 보냈던 시간, 친정집 마당과 마을 풍경들…. 당장이라도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한번 시집온 출가한 여자가 다시 친정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새색시 문준경은 남편으로부터 채워지지 않은 텅 빈 마음을 시부모님께 더욱 잘하는 것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달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함께 살고 있는 둘째 손위 동서는 시부모님들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작은동서, 쌀 모아 놓았다가 부자 되려고 하나? 웬 밥이 이렇게 모자라? 우리가 지금 대가족인데, 이만큼만 하면 어떻게 해. 여자가 손이 커야지. 시아부지에게 귀여움만 받으면 최고야? 아, 그리고 오늘 밥 먹다가 이빨 나갈 뻔했잖아. 밥에 돌을 넣었어?”

새색시 준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서러움만 북받쳐 올랐다. 활발한 성격의 문준경이었지만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상황 앞에서 멈추지 않는 눈물만 흐르고 있었다.

▲시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는 문준경
▲시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는 문준경

시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며느리 문준경을 불렀다.

“아가야, 네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지내던 모든 일을 내가 눈여겨 보고 있었단다. 가만히 보니 넌 참 총명하고 매사에 재능이 많더구나. 마음도 착하니 그 재질을 그냥 보기가 매우 아까웠는데…. 그래서 말이니 틈나는 대로 국문이라도 배워 두면 어떨까 싶구나. 온 나라가 어수선한데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위태롭기만 하구나. 게다가 근택이란 놈은 오도 가도 않고 늙은 애비 걱정만 시키고 니 속만 잔뜩 썩이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너를 볼 면목이 없단다. 그러니 글이라도 배워 그 속을 달래 보아라. 혹시 언젠간 써 먹을 날이 있지 않겠느냐? 내가 지금부터 직접 글을 가르쳐 주마.”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시아버 지가 그 꿈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니, 그동안 받은 모든 서러움과 외로움이 다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시아버지는 곧바로 종이에 국문을 써 나갔다.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그 기.

“한번 따라 해 보거라.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그 기.”

“네 아버님,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그 기.”

준경은 갑자기 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생각났다. 감격의 눈물이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아가, 너는 역시 총명하구나.”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시아버지의 배려에 깊이 감사했다. 그래서 준경은 더 열심히 공부했다. 나이 25세에 처음으로 글을 터득하게 된 그 기쁨은 이루 말할 바가 아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그날 밤에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을 만큼 신기하고 기뻤다. 준경은 그때부터 남편을 그리워하며 시름에 잠기는 일이 줄었다. 그 대신 글을 익히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 쏟게 되었다.

시부모님, 그리고 둘째 형님 가족과 함께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들은 너무도 많았다. 매번 밥 짓는 것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고, 식구들 빨래, 물을 길어서 물 항아리를 채우는 일, 밭에서 시시때때로 해야 할 일들, 헛간에서 방아도 쌓고, 길쌈도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이러한 고된 일들이 글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을 식히지는 못했다. 차분히 앉아서 글을 쓸 시간이 없어도 준경은 일하면서 땅바닥에 글을 써 보고, 손바닥에도 쓰는 연습을 쉼없이 했다. 또한 준경은 행여나 종이를 발견하면 모아 두었다. 매번 글씨 쓰는 연습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준경은 시아버지에게 붓자루 하나를 얻어서 닳고 닳을 때까지 쓰는 연습을 했다.

이렇게 밤낮으로 시시때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익힌 끝에 드디어 준경은 국문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제 눈에 보이는 글만 있으면 집어 다가 읽기 시작했다. 글을 읽으면서 생활한다는 것이 결혼 생활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준경의 또 다른 꿈인 아이는 들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근택의 둘째 아내

결혼 생활이 한 해 두 해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10년이라는 결혼 생활이 언제 그토록 빨리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서러움과 외로움, 때론 기쁨과 보람이 교차되면서 많은 시간이 흘러갔지만, 결혼 생활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문준경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문준경은 남편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노력했다. 겨울 한철 꼬박 길쌈을 지어서 봄이 되면 무명이나 베가 한 필이 되었는데, 그것을 장에 가서 팔아 송아지를 사고, 남편 정근택이 주로 거하고 있던 임자면 타지로 보냈다. 남편의 사업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문준경은 이렇게 남편이 잘되기를 바랐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가 되고 싶었다.

문준경이 이렇게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남편 정근택이 자녀를 얻기 위해 둘째 아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녀는 전남편과 사별하고 과부가 된 소복진이란 여인이었다. 그 당시 지주 집안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시집와서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는 것은 문준경에게도 큰 오점이었다.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한다는 책임이 문준경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죄책감마저 들게 했던 것이다.

하루는 동네 아낙네들이 우물가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문준경이 다가가자 말을 뚝 끊어 버리고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이내 문준경은 그 냉담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훗날 그동안 동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차갑고, “쯧쯧” 혀를 찼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 문준경이 아이를 가지지 못해서 남편이 외도를 했다는 것이다.

문준경은 속사정을 다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순탄하지 못한 결혼 생활이 슬퍼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러한 취급을 받으며 살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라도 생을 마치고 싶었다.

어느 날 준경은 캄캄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집에서 나와 바다로 향했다. 둘째 부인과 함께하는 남편에게 서운하고, 외면당하는 느낌 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편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갯고랑까지 어떻게 갔는지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들리고, 밀려들어 온 조수 물이 거칠게 발목까지 차 올라왔다. 문준경은 차가움에 놀라 다시 정신을 차렸다.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기만 했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이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죽음이 두려웠다. 그래서 한없이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문준경은 이때의 아픔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훗날 여러 사람들에게 쓴 글을 보면, 남편과 둘째 아내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저는 18세에 출가하야 37세가 되도록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어 그 결과로 남편과 첩 되는 사람의게 무한한 학대와 고통을 받어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목포성결교회에 나아 가 결심하고 얼마 동안 다니다가 십자가의 구원을 받었습니다. 구원을 받게 되자 곳압해도 개척을 도으며 때로는 목포 한쪽을 떼여 맡아 갖이고 개인 전도를 하였음니다. 그러는 중 친정에서도 처음에는 몹시 핍박하엿지만 점점 감화가 되어 제가 41세 되든 해에 서울학원에 방청생으로 입학하였음니다.

문준경, “나의 구원과 봉사”,

「기쁜소식」 제6권 3월호[1939], 9

제가 18세에 남편 정근택과 결혼하고 그 후 동거했습니다만 저에게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제가 32세 때의 해 1월경 남편은 아내를 맞이하여 동거하면서 저는 배 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부터 혼자서 슬프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37세의 때에 형제 중에 기독교를 신앙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저에게 수양과 위안이 되므로 기독교를 신앙해라고 권유해 왔기 때문에 저는 신앙하게 되었습니다.

1943년 형사재판소송기록의

문준경 신상 기록서에 나오는 증인신문조서

문준경은 남편이 둘째 부인을 얻은 것에 절망하였다. 자신이 버림 받고, 그동안 남편에게 가지고 있었던 작은 소망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남편뿐만 아니라 둘째 부인에 대해서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문준경으로서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심정이었다.

이런 절망의 마음은 몸을 해치고 있었다. 문준경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져서 그만 몸져눕고 말았다. 시부모님은 병약해진 며느리를 위해 백약을 지으며 며느리를 간호하였다. 절망한 마음으로 무력감마저 파고드는 인생의 고난 앞에서 시부모님의 마음과 지극 정성의 간호는 그나마 문준경의 병세를 악화시키지 않게 만들었다. 누워 있는 문준경은 시부모님의 고생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일어나서 밀려 있는 집안일들을 하려고 했지만, 시부모님은 몸이 회복될 때까지 쉬라고 극구 말렸다. 이렇게 문준경은 병상에서 죽을 고비들을 넘기고 있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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