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신앙입문과 교회생활(3-2)

목포교회에 다니는 문준경

문준경은 그 여인을 만나서 결심한 후 목포교회로 갔다. 목포교회는 오늘날 북교동성결교회의 전신이다. 문준경은 난생 처음 교회라는 곳에 가서 설교자의 설교를 들었고, 함께 부르는 노래가 찬송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좁은 집 안에만 있다가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활달한 성격의 문준경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그동안 맺혀 있던 한스러운 감정과 공허했던 마음이 가라앉게 되어 교회생활이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를 통해 듣게 되는 성경 이야기는 문준경에게 새로운 삶의 소망을 일으키고 있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북교동성결교회
▲북교동성결교회

문준경은 이제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설교자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씀은 문준경의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음속에 가득했던 그동안의 서러움과 한스러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듣고 싶었다. 그래서 평일에도 교회 예배가 있다고 하여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게 되었다. 주중에는 삼일기도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1927년 3월 5일에 입교하여 시작된 교회생활은 이렇게 매일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생활로 이어졌다. 주일 낮예배와 저녁예배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문준경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채워졌다. 당시 그녀의 나이 37세, 목포교회는 문준경의 신앙의 산실 이자 고향이 되었다.

신앙의 초석을 다져 준 장석초 전도사

교회생활 초기, 교회에서 문준경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설교자는 장석초 전도사였다. 장석초 전도사는 1875년 4월 28일 충남 서천군 남포읍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당대 거부인 7천 석지기의 가정이며, 대대로 유교 가문의 전통을 이어 왔다. 장석초는 집안에서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부모님의 자식 교육은 남달랐다. 장석초 전도사가 13세에 통감을, 17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할 정도로 한문과 학문에 열중했다.

하지만 부모의 엄격한 교육은 장석초에게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두통이 찾아왔고, 눈이 어지러워서 글을 읽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건강을 잃어간 장석초는 방황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허랑방탕하고 방종하여 그동안 학문으로 배운 윤리와 도덕이 간데 없었다. 심지어 부모님을 속이고 음란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허영심에 사로잡혀 외국에서 새 문명과 새 학문을 연구해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속이고 28세에 밀항선을 타고 하와이에 갔다. 하와이에서 그는 낯선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진취적인 성격으로 그곳에서 자신이 품은 생각을 관철하려고 하였지만, 의욕만 앞서고 계획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결국 빈손으로 귀국하여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 다. 아버지는 안타까워하면서 장석초에게 충남 홍산 소학교 교사를 추천하였다. 장석초는 아버지 의 추천대로 지원서를 내고 결국 교사로 취직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직장이 생기고 난 후, 그는 결혼까지 하여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이제 그의 삶이 균형을 찾은 듯 싶었다.

▲장석초 전도사
▲장석초 전도사

그는 교사 생활을 하면서 주변에서 순회전도를 해 오던 한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다. 여러 번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가진 만남이었다. 이 전도사는 장석초 선생에게 꼭 교회에 방문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장석초는 이 전도사의 인격이 훌륭하여 교회에 한번 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저녁예배 때였다. 교회에 처음 방문한 그에게 교회는 좋지 않은 인상으로 다가왔다. 기도하는 신도들을 보니 미친 사람들 같았고, 성경책을 보니 ‘사서삼경’만 못하고 ‘명심보감’보다도 못하다고 생각되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장석초는 어머니의 부처 신봉을 중단할 목적으로 어머니께 교회에 다닐 것을 강청하였다. 교회는 우상숭배를 금지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아들의 강권으로 출석하게 된 장석초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신앙이 금방 자라게 되었다. 주야로 기도하며 교회에 나가 예배하는 열심이 우상을 섬기는 옛날보다 더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만을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신앙생활은 그의 아내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아내도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믿음이 깊어져 갔다.

반면 교회로 인도했던 장석초는 점점 타락의 길로 빠져 들고 있었다. 교사 생활로 괜찮아지는 듯 싶었지만 옛 모습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매일 술은 기본이고 재물욕과 호색을 일삼으며 본처를 거들 떠 보지 않고 첩질을 하기 시작했다. 술 취함과 음란함, 재물을 탐하기를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끊지 못하여 본인 자신도 괴로워하며 평안함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번민이 가득찬 마음으로 길을 가던 중 길거리에 들려오는 찬송 소리를 따라가 보았다. 조그만 교회였다. 그곳으로 들어가 뒷자리에서 앞에서 말하고 있는 설교를 듣게 되었다. 마침 그 설교는 장석초의 번민하고 애타는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 주는 단비와 같은 말씀이었다. 그는 설교말씀을 그렇게 달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모두 다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그동안의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로 직시하게 되었다. 이때가 장석초에게는 인생의 대 전환점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자신의 생활을 눈물로 회개하였다. 결혼 했지만 두 집 살림을 했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다시 본처를 맞아들였다. 주독과 쾌락에 빠졌던 방탕한 생활을 버리고 불의로 취했던 것들을 다 배상했다. 모든 죄를 청산하니 하나님께 자신의 일생을 드리는 헌신된 마음만 가득해졌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주일 밤 예배 시간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의 마음에는 이미 세상의 성공과 출세와 재산을 포기하고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하는 신앙이 확립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교사로서 학생들을 데리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리고 짬을 이용해 아현동 성서학원을 찾아가서 입학시험을 치른 뒤 복귀했다. 평소에 마음먹고 있었던 신학교 입학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장석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교사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제 완전히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온전히 헌신하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장석초는 직접 성서학원으로 찾아갔다. 그가 성서학원 원장이자 교수인 이명직 목사와 나눈 이야기는 유명하다.

“제가 이번에 입학시험을 보았는데, 무슨 하자라도 있었습니까?”

47세의 장석초는 당찬 목소리로 성서학원 원장 이명직 목사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당신의 이력서나 간증을 보니 합격에 하자가 없었소. 그러나 소학교 근무 2년만 더하면 당신은 15년 근무 은급을 평생 받을 터인데, 그것이 아쉽지 않겠는지 생각해 보라고 합격을 보류 중이었소. 다시 한번 잘 생각해서 내년에 다시 신청하면 어떨까 싶군요.”

“원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그까짓 은급이 하나님의 사명보다 중한 것입니까?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서 허무하게 살다 죽어 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단 말입 니다.”

이명직 목사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장석초의 확신 있는 믿음과 사명자로서의 모습에 합격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이후, 이명직 목사는 부르심에 대한 사명을 설명할 때 반드시 장석초의 신학교 입학 시절 에피소드를 거론했다.

“신학생 여러분, 사명은 장석초 목사 같아야 합니다. 그가 입학할 때….”

장석초는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성서 학원에서 훈련을 받고, 1925년 50세에 성서학원을 졸업하였다. 하나님의 사명자로서 고향으로 돌아가 그가 한 일은 7천석지기 재산을 정리하여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돈 500만 원은 교회가 없는 목포로 파송을 받아 그곳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쓰였다. 바로 이 교회가 목포교회, 문준경의 영적 고향이었다.

장석초 전도사는 1925년 5월 목포에서 사역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 교회당을 건축하고, 총회로부터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1928년에는 신안 압해면 대천리에 제일교회를 개척하고, 1929년에는 압해면 동서리에 중앙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1933년에는 전라 도 최초 성결교회였던 함열성결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감당하게 되 었다.

장석초 목사에 대한 평가

함열교회의 이진과 장로와 류순봉 장로의 증언에 따르면(『성결교회 인물전』 제2집, 37쪽), 장석초 목사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첫째, 사랑의 실천자였다.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또 이웃에게 주는 사역자였다. 둘째, 그는 성경 중심의 설교가였다. 시사성이나 철학 사상이나 예화설교를 지양하는, 말씀 그대로를 풀어 설교해 주셨는데 오늘날의 강해설교라 여겨진다. 셋째, 예배 시에 정장을 입고 버선을 신고 출석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서 큰 책망을 하셨다. 넷째, 가정생활에서는 가족들이 쌀밥을 먹고 싶다고 하면, ‘신자는 지금 꽁보리밥도 못 먹는데 무슨 말이냐’면서 동고동락을 가르치곤 하였다. 다섯째, 인간관계에서는 방문하면 인사도 안받고 먼저 성경을 펴 놓고 30~40분 동안 말씀을 가르친 후에 인사하며 대화했고, 마지막에는 꼭 기도한 후에 헤어졌다. 여섯째, 한번은 한 성도가 무의식중에 유행가가 한 소절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이를 문제 삼아 신자에서 제명하고, 교사도 할 수 없다 하여 3일간 사죄를 빌어 겨우 용서를 받았다. 일곱째, 약점이라면 대인관계나 사회에 대하여 폐쇄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평가로 미루어 보아, 장석초 목사는 고지식하게 하나님의 말씀만 준행하려고 했던 우직한 목회자였고, 이러한 그의 신앙은 일 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았던 신앙으로 이어졌다. 1943년 5월 24일 성결교회의 ‘재림’ 사상이 일본 국체사상에 방해 된다고 하여 조선총독부는 전국 성결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을 마구 잡이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석초 목사는 67세의 노인이었는 데도 7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성서학원 이명직 목사가 일제의 강압 때문에 기관지 「활천」에 “우 리는 황국(皇國)의 신민(臣民)이며 천황(天皇)의 적자(赤字)다.”라고 글 을 올렸을 때, 장석초 목사는 이에 분개하고 탄식하면서 신사참배를 교단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옥중에서도 이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감옥의 간수들과 취조자들은 갖가지 회유로 장 목사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지만,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갔다. 장 목사는 초지일관 불굴의 의지로 타협하지 않는 대신 감옥 생활을 누구보다도 바르게 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모습은 순교를 각오한 행동이었다. 그는 옥중 수칙을 지키고자 가족들이 넣어 준 음식을 받지 않았다. 평상시 무릎 꿇고 앉았던 자세를 감옥에서 나갈 때까지 철저하게 지켜 냈다. 간혹 그를 보고 안쓰러워했던 간수들은 장 목사에게 잠시 자세를 풀라고 제의 했지만, 장 목사의 자세는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7개월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장 목사는 혼자 걸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동안 수족이 말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다시 만난 기쁨으로 감격했지만, 장 목사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그 후 가족들의 정성스런 간호로 5개월 후에는 조금씩 말문이 열리고 회복되어 갔다. 이는 감옥에서 죽지 않았지만, 살아서 순교한 것이 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것과 다를 바 아니었다. 장 목사의 순교적 신앙은 애초부터 그 안에 있었고, 문준경 전도사가 훗날 순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장 목사의 불굴의 신앙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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