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사명자의 길을 가다(4-4)

목포교회에서의 이성봉 목사의 사역

이성봉 전도사가 목포교회에 와 보니 자그마하고 비좁은 셋방 교회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전도하고 심방, 가정 집회, 구역 집회를 인도하며 하루도 쉴 새 없이 활동을 이어 갔다. 또한 이 전도사는 교회당 건축을 위해 유달산에 올라가 기도와 찬송을 시작했다. 청신기도단을 조직하여 어두운 새벽에 청년들과 함께 유달산에 올라가 이 지역의 영혼들과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 응답은 1년 만에 이루어져 교회 성도들과 미국의 어느 성도의 후원으로 총 50여 평의 교회를 짓게 되었다. 이성봉 전도사는 목사 안수를 받고 열심히 목회를 해 나갔다. 문준경 전도사는 목사가 된 이성봉 목사의 목회사역을 도우며, 그의 장점들을 하나하나 익혀 가고 있었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성회는 찬송을 은혜롭게 부르면서 집회를 인도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특히 이 목사가 직접 지은 찬송 가사 가운데 ‘가시밭에 백합화’ 라는 가사는 문준경의 삶을 대변해 주는 찬송시 같았다.

가시밭에 백합화 주의 성도여 쉬지 않고 찌르는 고통에 남모르게 눈물이 몇 번이던고. 주님께서 네 눈물 씻으리.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나의 사랑은 아름다운 향기를 떨친다.

▲이성봉 목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문준경 전도사(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성봉 목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문준경 전도사(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성봉 목사의 찬송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하는 호소력 짙은 찬송이었다. 이미 신학생 시절부터 어린이 부흥회를 인도하면 가는 곳 마다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났다. 문 전도사도 이러한 부흥집회를 여러번 보고 그 가운데 많은 은혜를 경험하였다. 당시 교회의 청년들은 이성봉 목사의 지도 아래에서 신앙을 다져 훗날 교회의 귀한 일꾼으로 성장했다. 차보근 목사, 이진우 목사, 김정기 목사, 김신근 목사, 염숙정 전도사 등이 복음으로 맺혀진 열매들이었다.

목포교회에 온 지 5년이 지나는 시점인 1936년 3월에 이성봉 목사는 신의주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이성봉 목사는 그곳에서 당시 성결교회에서 가장 큰 성전을 짓고 교회의 부흥을 이어 나갔다. 이 목사는 신의주의 새로 건축된 큰 교회에서 평생 목회하며 지낼 수 있었지만, 힘든 전국 부흥사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사역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지에 대해 1938년 기관지 「활천」에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금번에 귀중한 사명은 발서 만세 전에 예정하신 주님 계획이요, 4년 전에 보이신 이상의 감동이 오늘에 사실 성취되 올 때 일희일비에 정을 금하기 아렵슴니다. 무삼 연고이뇨 주님의 거룩한 뜻은 언제든지 일우어지는 것을 생각할 때 한 번 더 깃버하옵고 칙부태산지격에 중대한 책임을 감격 할 때 황송하고 떨리지 안을 수 업나이다. 나는 버레요 사 람이 아니며 지렝이요 띄글같은 미말의 자체를 도라볼 때, 이 사명의 말삼이 참으로 어려워 미듸안 광야에 모세가 내 게 거울이 되옵니다. 그러나 나의 본질을 아시고 택하신 하 나님 (내 권능은 약한 데서 강하니라) 아멘.

여기서 언급한 ‘4년 전’은 목포교회에서 사역할 때 보여 주신 이상 일 것이다. 그는 유달산에서 기도할 때 바위가 깨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목포교회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이상을 깨닫게 된 이성봉 목사는 훗날 한국의 부흥사로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이런 분과의 만남은 사역자 문준경,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다.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이성봉 목사의 신앙 각오는 목포교회에서 문준경 전도사에게 전달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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