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부봉교회당. 이수목 영수가 1906년 설립
옛 부봉교회당. 이수목 영수가 1906년 설립

부봉교회는 병마에 시달리던 이수목(1871~1952)은 집에서 5㎞ 거리의 면 소재지 산인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인이 됐다. 이수목은 1906년에 고향의 전답을 내놓아,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에 교회를 세웠다. 이수목 영수의 신앙은 존경받는 신앙이었다.

전정희 논설위원(국민일보)에게 동네에 연세 많으신 분이 말하기를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이수목 어르신은 진짜 믿음의 사람이었오. 새벽마다 빠지지 않고 추운데 목욕하고 기도를 하였소.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때 무지개가 떴고 발인할 때 쌍무지개가 떠올랐던 것을 동네 사람 모두가 보았소. 마을 사람들은 어르신이 무지개를 타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말했다. 이수목 영수의 믿음은, 살아서 주위 사람들이 인정할 뿐 아니라 죽음과 장례를 통해서도 인정을 받았다.

순교자 이현속 장로
순교자 이현속 장로

이현속 영수(1900-1945)도 부친 이수목 영수의 신앙을 이어받았다. 그는 열한 살 때 왕길지 선교사(Gelson Engel·1864∼1939)로부터 세례를 받고, 열다섯에 홍선이와 결혼했다. 1921년 이현속은 부봉교회 영수가 됐다. 그 시절 순회 목회를 해야 했던 목사 대신 지역 교회에서 말씀 봉사와 치리하는 이가 영수다.

그는 주일에 소(牛)도 쉬게 할 만큼 율법에 충실했다. 농번기 때도 예배를 위해 일을 하지 않는 그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했다. 이렇게 반듯한 젊은 영수는 4년 후 장로가 됐다. 그리고 체계적인 성경 공부를 위해 진주에 경남성경학원 1년 과정에 입학하고 사역자의 길을 선택한다.

이현속 장로가 평양신학교 입학 동기생들과
이현속 장로가 평양신학교 입학 동기생들과

성경학원을 마치고 경남 창녕 영산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이 무렵 동향 출신 순교자 손양원(1902~1950) 목사를 만나 동역했다. 이후 진주 문산교회, 하동 하동읍교회·악양교회, 산청 덕산교회을 돌며 단독 목회와 순회 목회를 했다. 1934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37년 산청 생초교회를 개척했을 때, 일본 군국주의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우상의 전에 참배하는 행위는 범죄행위이며 이런 영적 범죄행위에 따를 수 없다”며 저항했다.

이현속 장로가 키는 작지만 영적 거인이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이나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그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무엇인가? 단순히 마음과 말로만이 아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대로 지켜 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했다.

이 장로가 즐겨 부른 찬양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였다. 이현속 장로는 여러 차례 형무소에 수감 되어 숱한 고문과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1939년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하다가 8월 19일 옥에 갇혔다. 이 장로는 1941년 평양형무소로 압송되었고 1943년 7월에는 옥바라지하던 홍선이 부인이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1945년 4월 이현속은 영양실조로 쓸어 젔다.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월 23일 아내를 따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시신은 평양 돌박산기독교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이현속의 손자 이충길장로
이현속의 손자 이충길장로

현재 부봉교회는 이충길 장로가 증조부(이수목)와 조부(이현속) 그리고 아버지(이은성)가 지켰던 교회에서 예배자로 섬기고 있으며 그의 아들 이규섭(경남 창원 새순교회) 부목사에게로 이어지고 손주들까지 하면 6대(代)의 신앙 가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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