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결혼 생활(2-1)

▲문준경 전도사
▲문준경 전도사

어린 문준경은 청소년 시기를 지나 어느덧 만 17세의 처녀로 성장 하였다. 집에서는 혼기를 놓칠세라 시집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결혼은 여느 규수들과 같은 방식으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하는 양 집안끼리의 정략결혼이 일반적이었다.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오면서 결국 아버지는 지도면 증동리에 사는 정기운 씨 집안과 사돈을 맺기로 하고 정씨 집안 삼남인 정근택 군과 결혼시키기로 정하였다. 양 집안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었던 지주들이었다. 이때가 1908년 3월 18일이었다.

17년 동안 살던 암태도 고향을 떠나 이제까지 한번도 가 보지 않았던 증도로 떠나야만 했다. 어머니가 준비해 준 저고리를 입고 곱게 치장을 한 뒤, 마지막 인사로 친정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다. 부모님이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신 혼수품을 가지고 증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구한말 가마 타고 시집가는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구한말 가마 타고 시집가는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저 멀리 손을 흔들고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를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남편에게 잘하고, 시부모님과 그 가족들에게 잘하거라.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어머니의 말씀이 배를 타고 증도로 가는 내내 귓가에 울렸다. 드디어 증도, 당시 지도면에 도착해, 준비된 가마를 타고 정씨 집안으로 향했다. 동네에는 이미 혼례에 대한 소문이 돌아 새색시 문준경의 가마가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씨 집안에 도착한 문준경은 남편이 누구일지 너무도 궁금했다. 전통혼례가 진행되고, 새색시 문준경은 신랑을 살짝 엿보게 되었다. 신랑의 모습은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했다. 신부 문준경은 앞으로 정붙이고 살아가야 할 신랑을 보니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그리고 왠지 그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앞으로 친정 부모님이 말씀해 주신 것을 명심하면서 한평생 남편에게 잘하고, 아들, 딸 낳아 행복하게 오래 살 것을 꿈꾸었다.

남편 정근택과 정씨 가문

남편으로 맞이한 정근택의 집안은 일찍부터 증도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 증도 정씨 문중은 1788년(정조 12년) 증도면 등선 마을에 영일 정씨(정해성)로 시작되었고, 그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등선 마을이란 이름은 일출 시 햇빛이 온 마을에 가득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결혼할 당시 남편 정근택의 아버지 정회운 씨 와 어머니 김공섭 씨는 증동리에 살고 있었다. 신랑 정근택의 부모님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 정회운 씨는 58세에 늦둥이를 얻게 되었고, 이 늦둥이는 형제들 중 3남으로 문준경 전도사의 신랑이었다. 신랑 정근택은 일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유한 가정 환경 가운데 자랐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목포 일본인이 운영하는 어선 용품 판매점(선구점)에서 일하면서 일본어에 익숙해지고 장사 기술을 습득했다. 선진문물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 

그는 훗날 임자도 민어 파시에서 객주업을 하면서 성공하게 된다. 파시는 바닷가 어장으로 바다 위에서 어획물 매매가 이루어지는 시장이다. 이곳에서 물품매매를 중개하고, 수산물을 수출하였던 것이다. 여러 가지 일 가운데는 새우를 잡아서 건조한 후에 대만에 수출하는 일도 있었다. 그의 활동영역은 일본에까지 미치었는데, 일본에서 양식업을 배워와 무인도에 나무를 심어서 자란 나무를 활용하여 김 양식을 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통해서 임자도의 대부호가 되었고, 정근택의 별명이 ‘서해안의 장보고’였을 정도로 서해안권 해상무역을 중추적으로 감당하는 인물이 되었다. 해방 후 에 그는 목포 어업조합의 초대 대표가 되었다.

정근택은 결혼 당시에도 늘 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포와 임자도뿐만 아니라, 신안군의 여러 섬과 일본까지 왕래하면서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그는 사업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결혼 생활에 충실할 수 없었다. 시부모님도 아들의 이러한 생활을 걱정하며 며느리 문준경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신부 문준경은 남편이 신념을 가지고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좋게 생각 했다. 그러나 남편이 점점 밖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늘어나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 줄어들자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참고 또 참고 혼자 지내는 날이 일상생활이 되자, 문준경의 인내도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문준경이 생각했던 일반적인 신혼생활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려는 소박한 꿈이 그녀에게는 불가능해 보였다. 어려서부터 여자들에게 하나밖에 없었던 인생의 꿈, 남편의 부인으로, 아이의 어미로, 시부모님의 며느리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려고 했던 신부 문준경, 그녀는 절망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마음을 어찌 해야 할 줄 몰랐다.

외로웠던 땅 증도

문준경 전도사가 신부가 되어 앞으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야 할 곳은 증도라는 섬이었다. 증도는 물이 귀한 섬이어서 시루섬, 또는 시리섬이라고 불렀다. 증도는 1902년에 전증도(前甑島)와 후증도(後甑島)가 합해지면서 증도라 부르게 되었다. 이 섬은 1896년 지도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69년에 신안군으로 들어가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준경 전도사가 시집갔을 무렵 증도는 지도군에 속해 있었다.

섬 일대인 방축리 앞바다는 14세기 때 침몰한 중국 원나라 무역선이 발견되어 1976년부터 1984년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유물을 발굴한 곳이다. 송나라와 원나라 유물 22,000여 점이 발견되어 고대 동양의 무역선의 실체를 파악하는 매우 중요한 물증을 얻게 되었다. 유물 대부분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청 산하기관으로 나누어져 보관 중이고, 몇 차례 명품 위주의 유물 1,000여 점이 전시되었다. 현재 증도에는 유물이 발견된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신안해저유물발굴 기념비가 세워져 이를 기념하고 있다.

▲송나라와 원나라 때의 도자기
▲송나라와 원나라 때의 도자기

증도에는 상정봉이라는 산이 있다. 오늘날에는 산정봉이라고 표지되어 있다.

증동리 산정봉은 원래 윗 상(上), 바를 정(正), 봉우리 봉 (峯)으로, 옛 지명이 증도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가에도 등장하고 있다. 이곳은 해발 약 40m의 낮은 산이고 정상에 오르면 증동리 마을과 그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경치가 장관을 이룬다. 여기에는 당할 머니를 모시는 제단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전설에 의하면, 한때 제사를 소홀히 하여 마을의 소년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서 죽은 일이 있었는데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리자 그런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곳 사람들은 산의 정기와 기운을 받아야 집안이 번창한다고 생각해서 산 곳곳에 돌무더기로 제단을 쌓고 때가 되면 제사를 지냈다. 그 자리가 서낭당 나무였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증도에서는 이처럼 자연에 복을 비는 미신이 성행하고 있었고, 바다를 다스리는 신과 마을과 집안을 다스리는 신에게 제를 지내고 있었다.

▲신안해저유물발굴 기념비
▲신안해저유물발굴 기념비

주민들은 어업보다 농업에 치중한다. 농작물로는 쌀, 보리를 비롯 하여 감자, 콩, 참깨, 마늘 등이 생산되었다. 연안에서는 민어, 숭어, 낙지 등이 어획되며, 굴, 고막도 채취된다. 또한 이곳은 김 양식이 활발하고 천일염 생산량이 많은 곳이다.

▲증도 지도
▲증도 지도

오늘날 증도 대초리에는 예전의 염창을 개조해서 만든 소금박물 관이 있는데, 이 건물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서 2007년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배로만 도달할 수 있었던 증도는 2010년에 증도대교가 개통되면서 무안의 해제반도까지 육로로 통하게 되었다.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증도초등학교와 증도중학교가 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내용입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