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신앙입문과 교회생활(3-4)

김응조 목사를 만나다 

문준경 집사의 전도활동은 나날이 왕성해졌다. 고향에 갔다 와서도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러던 중 생계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재봉틀이 다르게 보였다.

 “그렇지. 이거야!”

이때부터 문 집사는 생각나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삯바느질을 더 열심히 했다. 전도할 때 쓰이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전도를 하려고 밖으로 나가서 주변 사람들을 만나 보면 하나같이 안타까운 사정이 있고, 도와야 하는 일들이 태반이었다. 필요한 것들을 사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양말, 지갑, 과자, 음식 등 모든 것을 구입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비용은 재봉틀로 옷을 만들어서 마련하였다. 장석초 목사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며, 교회를 세우는 데 헌신하였듯이 문준경 자신도 그 모습을 본받으며 따라가고 있었다.

문 집사는 장석초 목사를 도와 목포교회 주변은 물론이고 압해도까지 가서 전도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압해도 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 장석초 목사는 압해도의 부흥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목포교회를 사임하고 섬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남은 재산을 총동원하여 압해대천교회와 동서리교회를 세워 나갔다. 장 목사의 열정적인 사역으로 인해 목포교회는 새로운 목회자가 필요했다. 이 때 목포교회의 새로운 목회자로 김응조 목사가 오게 되었다. 문준경 집사와 김응조 목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응조 목사가 목포교회로 오기까지

김응조 목사는 1896년 1월 23일(음력 12월 3일) 경북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7세 즈음에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13세 되던 해에 온 가족이 마을에 있는 장로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서 내려온 애국지사 최봉희는 마을 사람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하고 애국심 고취를 위해 연설을 했는데, 그곳에서 최봉희는 애국하는 길이 예수를 믿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하려면 미국 사람들과 친해져야 하고, 미국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연설에 감동을 받고, 연설을 들었던 많은 사람 이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때 김응조의 아버지 김윤섭도 기독교인이 되고자 결단했고, 가족 모두가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교회를 통해 부친은 신학문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아들 김응조를 경산에 있는 계동학교로 보내어 신학문을 배우게 했다. 그는 기독교 학교인 계동학교에 다니면서 모세와 같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집에서는 아들 김응조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하지만 김응조는 적극적으로 동네의 일거리를 찾아서 용돈을 벌어 가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졸업 후, 그는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모세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스스로 변호사가 되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법률전수학교의 입학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일본어 실력이 모자라서 합격하지 못하였다. 그러고 나서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공부를 할 생각으로 당시 게일 선교사를 방문하여 사정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의 도움을 받아 또다시 미국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자신의 계획과 추진한 일들이 모두 막히게 되자, 그는 이제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강으로 가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그 순간 그에게 어머니 얼굴이 나타나 “잠깐만 참아라.”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는 죽으려고 했던 마음을 접고,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정처 없는 마음을 달래느라 발길 가는 대로 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양선교회 경성성서학원에 다다랐다.

▲존 토마스 원장
▲존 토마스 원장

마침 그곳에서 성서학원 원장이었던 토마스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김응조는 그에게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자기 인생의 새로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토마스 원장은 그에게 입학할 수 있는 나이가 1년 남았으니 내년에 오면 입학을 허락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그는 절망으로부터 빠져나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길은 예전에 자신이 모세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길이었다. 결국 그는 1917년 4 월 15일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교에 입학할 때 그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신학생이 된 그는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 인생의 길을 가고자 할 때에는 외국으로 향하는 길이 다 막 혔지만,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고자 했던 그때부터는 외국으로 나갈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당시 토마스 원장은 일본에 있었던 동양선교회 카우만 총리로부터 한국 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 전도에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여기에 김응조 신학생이 선발되어 일본으로 전도하러 가게 되었다. 김응조는 해리스 선교사의 전도대에 소속되어 일본의 최남단 구주 지방 각지를 다니면서 전도활동을 펼쳤다. 전도활동은 1년간 이어졌고, 당시 10만 집에 10만 권의 책을 전달하였고, 33회의 노방전도 설교, 개인전도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많이 경험하게 되었다.

김응조는 일본에서 돌아온 후, 1919년 3월 기미독립운동 학생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이를 빌미로 체포되고, 대구형무소까지 끌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법정으로부터 4년 구형에 2년 실형을 받아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20년 7월 15일에 출옥 한 뒤 그에게는 다시 신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당시 성서학원장이었던 길보른 선교사가 김응조의 감옥 생활과 평소 실력을 인정하여 졸업장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20 년 10월 1일 그의 나이 23세에 신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김응조 목사
▲김응조 목사

그가 1926년 3월에 30세 나이로 목사 안수를 받기 전까지 그는 강원도 철원교회, 경기도 광주 경안교회, 안성의 안성교회, 서울 아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목사가 된 이후, 김응조 목사는 아직 미개척지인 북선 지방 감리목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북도, 북구 강원도 일부, 북간도 전체를 맡게 되었다. 김응조는 그곳에서 모든 열정을 쏟아부으며 30개 교회를 추가로 일으켜 세워 교세 확장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북부 지방 감리목사로 파송받아 5년 동안 한반도 북선(北鮮) 지방 교회를 10개에서 40여 개로 크게 확장했던 사역은 그의 몸에 무리가 되었고, 매번 과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몸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갔다. 그는 그때의 사역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에게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폐병 환자와 동거도 하고 열병 환자와도 한 방에서 뒹굴고 사귀 병자와 한 방에서 철야도 해보고 몇백 리 길을 도보로 걸어서 가기도 하였고 교회 사건이 있을 때에는 진두에 서서 지휘도 하였고 순회하는 교회마다 집회로 그들의 영적 부흥을 도모하고… 중략 … 이렇게 활동하는 동안에 유한한 나의 육체는 외강내허의 위험한 지경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르게 되었다.

『성결교회인물전』 제3집, 39~40쪽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만성적인 소화불량, 불면증, 폐렴이 그를 늘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더 이상 북선 지방 사역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사임하게 되었다. 그는 경성에서 요양을 하며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랐지만, 요양 중 병이 악화되어 세브란스병원으로부터 폐병 2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김응조 목사는 비록 육신은 병들어 있지만 주의 사명을 붙들고자 따뜻한 남쪽 조용한 곳으로 파송해 달라고 교단에 요청하였다. 이러한 상태를 알고 있는 총회본부에서는 김 목사가 지원한 따뜻한 남쪽 목포교회로 파송해 1929년 7월 14일 목포교회에 담임교역자로 부임하기에 이르렀다.

목포교회에서의 김응조 목사의 사역

사실 김응조 목사의 건강을 생각하면, 목포교회로 부임할 수 없었다. 그는 중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목포교회에 부임한 것은 마지막 죽을 각오로 목회하겠노라 결심한 것이었다. 그는 목포 유달산에 올라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1930년 8월 1 일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이 두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호소하며 매달렸다. 이렇게 생사를 건 기도가 한 달 동안 이어지고, 드디어 그는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이 확신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때는 1930년 9월 30일이다. 내가 기도를 시작한 지 만 한 달이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셨다. 죽음을 주시지 않고 은혜를 주셨다. 나에게 이상을 보여 주셨다. 내가 앉아서 기도하는 반석이 갈라지면서 밑창에서 생수가 솟아오른다. 넘치는 생수에 내 몸이 둥둥 떠있다. 이 환상이 지나간 후 정신을 차리니 내 마음에 기쁨과 소망과 평화가 샘처럼 솟는다.

그리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온몸에 불이 붙는다. 그때에 내가 내 몸을 보니 유리알처럼 맑아지며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몸은 날아갈 것같이 가벼워진다. 그때에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는 살았다. 받았다.”였다. 나는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새찬송가 526장) 이 찬송을 몇 십 번 불렀는지 알 수 없다.

『성결교회인물전』 제3집, 40~41쪽

김응조 목사는 자신이 체험한 신유의 은혜를 교회에서 간증하며 100일간 부흥회를 열었다. 이에 목포교회 성도들은 놀라운 신유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목포교회 성도들은 이 은혜를 전하고자 전도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갔다. 그 결과 이 부흥회로 20명 남짓 한 목포교회 공동체에 새로운 신자 120명이 결신하여 들어오게 되었다.

문준경 집사는 이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헌신하였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병을 고치는 신유로 나타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문준경은 신앙 세계의 새로운 면에 눈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주님을 위해 말로만이 아니라 삶을 드리고 생명을 드리는 헌신의 길을 생각하게 되었다.

훗날 문준경 전도사는 섬마을 곳곳을 누비며 선교할 때, 육체와 영혼이 병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신유의 은혜를 간구하며 치유의 사역을 확신 있게 펼쳐 나갔다. 그녀는 돌아다니는 의사요, 간호사, 영적인 치료자로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병 낫기를 위해 하나님의 신유를 선포하며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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