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열린 ‘교회와 민족’ 첫 강좌 ‘한국개신교의 기원문제’에서 밝혀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Bible-loving Christian),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Bible lovers)라고 불렀고,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언급했습니다.”

▲ 26일 기독교회관 7층 예배실에서의 '교회와 민족' 강좌 모습

선교사 입국 전, 성경 반포로 복음 이미 전해져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이만열 교수가 초기 한국 기독교(개신교)역사를 한 마디로 ‘성경 기독교’의 역사로 정의했다. 26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화해통일위원회 주최 ‘교회와 민족’ 강좌에서다.

이 교수는 이날 강좌에서 “복음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이 한글로 먼저 번역되고 그것이 한반도에 보급됨으로써 한국에는 개종의 역사,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됐다”며 “이는 세계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일일 뿐 아니라 그 후의 한국기독교의 성격을 규정하고, 한국교회의 성장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입국에 앞서서 한국에 성경전파로 개종의 역사가 이뤄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로, 1885년 초 봉천(심양)을 방문한 서상륜이 자기가 2년간 성경(1882년 최초 한글 간행된 존 로스 본)을 반포했던 사역을 보고한 보고서를 근거로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서상륜은 자기가 2년간 성경을 반포했던 곳(서울)에서 70여명의 세례 청원자가 있음을 보고하는 한편 서울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서는 몇 주 전부터 ‘설교당’(preaching hall)을 만들어 놓고 모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이 교수는 “이 무렵 일본에서도 한국인 이수정이 개종하고 성경을 번역 출간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가 번역한 성경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입국 전에 출간 돼 선교사들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올 때에 그 성경을 가지고 들어 왔다”며 “이 역시 한국기독교의 ‘성경 기독교’적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경번역, 권서들의성경 보급, 사경회 운동 ‘주마가편’

이 교수는,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에는 △계속적인 한글성경 번역과 △권서들에 의한 성경 보급 그리고 △사경회를 통한 말씀의 흥왕이 원동력으로 자리했음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서 입증했다.

이 교수는 “국내에서의 1900년 ‘신약전서’, 1910년 ‘구약전서’ 번역 등 성경의 번역은 우리말을 한글(문자)로 정착시키는 게기가 됐고, 한글을 대중의 글로 만드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면서 “하층민(노동자)과 부녀자를 주요 선교대상을 했던 개신교(특히 장로교)는 복음전도에서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발표에 의하면 영국성서공회가 1896년부터 1940년까지 한국에 반포한 성경은 총 2천만권이 넘는다. 매년 46만권이 반포된 셈이다. 미국성서공회가 1901년부터 1919년까지 반포한 것은 총 266만권으로 매년 14만권이 반포됐다.

이 교수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이미 성경의 보급만으로 개종의 기적이 일어났던 한국에 이같이 많은 양의 성경 반포는 곡 전도와 개종을 촉진시켰음을 의미한다”면서 “이러한 활발한 성경반포 이면에는 ‘권서’들의 숨은 봉사활동이 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 교수에 따르면 당시 영국성서공회 성경보급의 약 85%가, 미국성서공회 성경보급의 약 98%가 권서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이어 이 교수는 “성경이 광범하게 반포되자 한국의 초대 기독교공동체에서는 성경을 일기 위해서 ‘국문공부 운동’이 일어낫고, 뒤이어 ‘사경회’(査經會)라는 이름의 성경공부가 일어났다”며 “이러한 사경회 운동이 한국교회의 지속적이 성장의 토대가 됐음은 잘 알려진 일”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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