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협 등 ‘3.1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컨퍼런스’ 공동 주최

▲ 25일 서울 롯데호텔에서의 국제 컨퍼런스 모습

3.1운동 하면 독립선언서와 33인의 민족대표를 떠올린다. 특히 한국교회는 33인 중 기독교인이 16인으로, 단순 수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종교의 세를 반영한 상대적 수치에서 의 절대적 우세로 인해 자랑스러워한다.

익히 아는 대로 민족대표 33인은 예외 없이 종교인들이었다. 당대 최고의 교세를 떨치던 민족종교인 천도교계 15인, 기독교계 16인 그리고 불교계 2인으로 결성됐다.

이와 관련 ‘왜 33인의 민족대표 모두가 종교인이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가져본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기에 ‘왜 33인의 민족대표 모두가 종교인이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더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해 한국사학자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답했다. 25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3·1 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 콘퍼런스’에서다.

윤경로 전 총장은 교회협(NCCK), 기사련 등이 ‘3.1운동의 의미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미래 구상’이라는 주제로 공동주최한 컨퍼런스에서 ‘한국인의 눈으로 본 3·1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강연했다.

‘3.1운동은 민(民)이 주도한 혁명’이라고 주장하며, ‘3.1운동’을 ‘3.1혁명’으로 개칭하자고 주장한 윤 전 총장은 이 점과 관련해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언급하는 과정에서 ‘왜 33인의 민족대표 모두가 종교인이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윤 전 총장에 의하면 이들 민족대표 33인은 누가 시켜서 대표가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임하여 민족대표로 나선 분들이었다.

3.1거사 초기 준비단계에서는 본래 민족대표로 당대 지명도가 높고 과거 고관대작을 했던 유명인사들, 예컨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등으로 명성이 높았던 개화파 인물 박영효, 구한말 대신 출신인 한규설, 윤웅렬 당대 퇴고의 개화 지식인으로 지명도가 높았던 윤치호, 심지어 이완용도 거론되었다고 한다.

▲ 주제 강연 중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윤 전 총장은 “그러나 이들 중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민족대표 자리를 거부했고, 그래서 결국 종교인들이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윤 전 총장은 “당시 이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지체가 높지도, 명성도 별반 없던 종교인 인사들에 불과했다”면사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는 바는 이들 33인이 예외 없이 모두 평민출신이라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천도교 교령 출신인 손병희를 비롯 권동진, 오세창 등과 기독교계의 이승훈, 길선주, 양전백 등 그리고 불교계의 백용성, 한용운 등 33인은 예외 없이 평민 출신들이었다는 게 윤 전 총장의 설명이다.

윤 전 총장은 “언제부터인가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매우 비판적이며 폄하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면서 “민족대표들이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선언하는 엄중한 자리에서 술판을 벌렸느니 태화관 여주인과 시비를 벌렸느니 더 나아가 이들 대표 중 대부분이 변절을 했다는 등 역사적 사실 아닌 낭설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물론 윤 전 총장은 “33인 중 두서너 사람이 훗날 변절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면서 “그러나 이 점만으로 민족대표 전체를 싸잡아 추태를 버렸다든지 변절자로 폄하,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윤 전 총장은 “이는 실제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엄혹한 상황에서 3,1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분들을 욕보이는 것이며 더 나아가 3.1정신을 흐리게 하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시키는 ‘역사 자해행위’라 하겠다”고 쓴소리 했다.

윤 전 총장은 “3.1운동 당시 전 인구가 1천 7백만명 정도였는데, 이중 기독교인은 2%인 30만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서 “그럼에도 실제 3.1운동을 전 민족적으로 조직화하고 확산시키는 데 한국교회와 기독인들이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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