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건강연구원 이효상 목사의 '미래목회 칼럼'

드라마와는 다른 삶의 여정

얼마전 구한말 의병 조직의 태동과 확산을 그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항일 무장투쟁사가 재조명되었다, 드라마를 보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며 총을 쏘는 선구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멋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독립된 나라의 꿈을 오늘 우리는 맛보고 있다. 이 드라마는 위기의 나라를 구하러 나선 민초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재소환하여 의병 활약과 선교사들의 역할을 본격 다루며 개화기 주체적 여성의 모습과 함께 친일·매국 문제를 오롯이 새겨 젊은 시청자에 강한 역사의식을 심어주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였다. 이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이나 영화 ‘밀정’처럼 결코 멋진 일이 아니었다. 일제의 핍박에 맞서 쫓겨 다니면서 한시도 편히 잠들 수 없는 상황과 풀뿌리를 캐먹으며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사람들의 냉대를 받으며 36년 이상을 버텨야 하는 고난에 찬 삶의 여정이었다.

독립투사들의 치열한 독립운동의 전개

1910년 8월, ‘병합’으로 대한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조선 총독부가 설치되어 한민족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지화하였다. 이때부터 독립투사는 그 이전의 의병과 확연히 구분된다.

또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은 "삼천리 금수강산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라는 노래를 부르며 옷고름을 다잡았다. 이렇게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독립운동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와 일제의 관청과 군부대를 습격하는 일이었다.

1920년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연합 독립군은 두만강 건너 봉오동에서 일본군 수백명을 유인하여 몰살시켰고 이어 백두산 줄기인 청산리와 어랑촌에서 홍범도, 김좌진, 이청천 등의 연합독립군으로 일본군 천 여명을 몰살시키는 대승리를 연출한 청산리전투의 영웅적 활동상을 알고 있다. 이들은 무장활동에 그치지 않고 국내의 인재들을 모아 군인양성의 무관학교를 열고, 탄압을 피해 넘어온 동포들에게 농토를 개간하게 하였고 가르칠 학교를 세워 나운규, 윤동주, 문익환 같은 인물들이 명동학교를 통하여 배출되었다.

이들은 피나는 노력으로 생업을 꾸리고 생업을 결과를 가지고 독립항쟁을 동시에 벌였다.

그러나 일제는 만주의 괴뢰정권과 손잡고 우리 동포와 독립군들을 무수히 죽였다. 남은 독립군들은 산 속에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싸웠고 나머지는 러시아 땅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부는 중국본토인 북경과 상해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먼저 독립운동의 기지를 만든 이가 신규식, 박은식과 같은 독립투사들이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이 급진적인 무력항쟁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을사조약 이후부터다. 그러나 교회조직에 매이지 않은 개별적 인물들의 테러활동이었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정순만 등은 평안도 장사들을 모아 수차례에 걸쳐 을사오적 암살을 기도했고, 평양교인 최재학 이시영은 격문을 뿌리고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강화도에서는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들고 온 연희전문학교 출신 황도문과 대한제국 군인이었다. ‘갑곶전투’후 의병이 된 유봉진 권사는 ‘길상전투대’를 조직하여 항쟁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태동하게 된다. 이래서 상해는 우리 독립운동 투사들이 모여 들었다. 임시정부의 요인 외에도 이회영, 신채호, 여운형, 김창숙, 정인보 같은 지사 학자들도 모여들었다. 이때에는 3.1운동에 힘입어 독립운동 자금이 그전보다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몇 년이 못 되어 그 방향성을 가지고 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임시정부에서 나온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적 독립운동을, 안창호는 하와이 등지에서 시민운동으로 독립심 고취를, 박용만은 미군 사관생도의 양성과 군사교육에 열중하였다.

이때에 의열단이 만주 길림성에서 본부를 옮겨오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테러를 위해 국내에 침투하여 총독부와 경찰서 그리고 농민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가하면 일본으로 진출해 천황이 탄 수레에 폭탄을 던지는 등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이런 흐름에 맞게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대장 등 여러 명을 폭살시키므로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소련에서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맡았다가 러시아로 가서 독립자금을 끌여 들였고, 홍범도는 만주에서 다시 망명하여 러시아를 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 나서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3.1운동과 6.10만세사건이 있은 후 일제의 탄압은 간혹했다. 이런 상황을 신채호 선생은 “강도 일본이 헌병 정치, 경찰 정치를 행하여 우리 민족은 조그만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가 일체 없어 고통과 울분,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 냉가슴이나 만질 뿐이요, 눈뜬 소경이 되고 말았으며, 자식을 낳으면 일어를 국어라, 일본글을 국문이라 가르치는 노예 양성소(학교)로 보내고,…”라고 하며 ‘조선혁명선언’을 하게 된다.

 해외의 항일 독립운동

항일 독립운동은 1930년 신간회를 발족하면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방향성이 달랐다. 또 분열로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신간회는 체포된 독립투사의 무료변론을 비롯하여 일제의 불법을 고발하고 농민, 노동자의 보호에 나섰다. 이런 와중에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모든 운동단체를 불법화하고 친일단체를 육성시켰다.

이런 탓에 조선 공산당이나 건국동맹과 같은 단체들은 지하운동으로 나갔다. 이러면서 중국쪽도 지지부진하였다. 간도나 북경, 상해도 독립군의 기지가 될 수 없었다. 일제는 용정의 우리 동포마을과 교회를 불태우고 주민을 모조리 죽이기도 하였고 첩자들을 풀어 독립투사들을 검거하였다. 그래서 임시정부도 중경 등지로 옮겨 갔으며 의열단도 남경 등지로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항일 독립운동 투사들은 1940년 9월 17일 총사령에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우리 군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광복군)를 조직하였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용대도 1941년에 여기에 통합되었다. 이들은 군사훈련을 쌓으면서 2차대전 참전을 준비하였고, 중국 오지인 연안이나 태항산 지구에서 항쟁을 벌였다. 이렇게 끝까지 항쟁을 벌였다. 이들은 겪은 고초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수많은 민초들, 이름 없는 영웅들, 무명의 의병과 독립투사들

고난받는 민초들과 함께 항일 독립투사들은 나라 잃은 설움으로 나그네 신세가 되었고 온갖 학대와 수모, 굶는 일, 노상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지내야만 했다. 이뿐만 아니라 헤어진 누더기 옷을 입고 추위에 떨어야만 했고, 체포되면 팔 다리가 부서지는 고문을 겪으면서도 ‘독립 조국’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회영과 신채호는 이렇게 대련의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김창숙은 다리가 부러져 앉은뱅이가 되었다.

이렇게 ‘독립조국’의 꿈을 가진 민중들도 만세만 부른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빚더미에 쌓였을 적에 ‘국채보상운동‘으로 여성들은 금비녀를 뽑아 바쳤고, 상인들도 독립투사들이 군자금을 모으면 몰래 돈을 거두어 주었다. 여기에 지주도, 자본가도, 양반도, 양반도, 백정도 있었다. 독립투사들이 피신하면 목숨을 걸고 숨겨주는 일이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도리가 되었다. 만주와 상해의 동포들도 밭을 갈거나 노동을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원하였다.

이렇게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세계대전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독립운동이 없었더라면 나라와 민족정신을 유지하고 이어가는 원동력은 잃었을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며 항일운동,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수많은 민초들, 이름 없는 영웅들, 무명의 의병과 독립투사들의 독립운동을 되새기면서 민족의 정신를 회복하여 그 에너지를 통일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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