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김명구 교수, ‘한미관계와 기독교 심포지엄’서 밝혀

▲ 발제 중인 김명구 교수(우측)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점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은 물론 일반인들도 잘 인지하고 있는 바다. 하지만 ‘1907년 대부흥운동’이 한국교회사를 넘어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역사적 의미란, 외교적으로 당시 조선에게서 마음이 떠났던 미국의 관심을 조선으로 다시 돌려놓음으로써 종국에는 한국독립으로 이어지는 동기가 됐다는 사실이다. 1907년의 영적대각성운동이 미국교계를 자극시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끼쳐 카이로 선언으로까지 연결됐다는 것이다.

22일 오후 서울신대 우석기념관 강당에서 한국기독교복음단체총연합회(대표회장 정인찬) 주최,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주관으로 열린 ‘한미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에서다.

이날 첫 발제자로 나선 김명구 교수(연세대 이승만연구소)는 ‘초기 한미관계와 기독교’라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아니었으면 한국근대사가 다르게 쓰였을 수도 있다는 취지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김 교수에 의하면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빙자로 미국공사관이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국가 간의 관계는 끝이 났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 것은 국제역학의 문제 때문이었지만, 한국이 미래에도 미국에 이익을 줄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한국선교를 더욱 확대했고, 미국공사관이 폐쇄되었음에도 선교사들은 더욱 더 적극적으로 한국선교를 했다. 선교사들의 활동은 1907년으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1907년의 결실(대부흥운동)은 미국교회의 실적이 되었고 자랑이 되었고 그 결실로 인해 미국 정부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미일관계에 금이 가는 단초가 되었고, 종국에는 한국독립으로 이어지는 동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것은 1912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 (1911년 일본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가둔 사건: 편집자 주)에서 잘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에 따르면, 1912년 10월 11일 뉴욕의 ‘알딘클럽’(The Aldine Club)에서 미국기독교계 인사들이 모여 '105인 사건'을 심도 있게 토의했고, 여기에서 14개 항에 걸친 권고문(recommendations)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당시 미국 기독교계 인사들은 전직 국무장관, 전직 뉴욕시장, 예일대학 총장 등 미국사회와 정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권고문으로 인해 미국의 대일(對日)인식과 정책에 균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후 미국의 대일정책은 변화를 일으켰고, 후일 카이로선언으로 연결됐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1907년을 시작으로 재한 선교사들은 일본이 한국인들과 한국교회를 학대하는 정황도 비밀리에 미국교회에 전했고. 미국교회는 한국의 정황을 미국정계와 사회로 알렸고, 한국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상당수의 미국교회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을 직접 호소하고 설득한 결과 1940년대까지의 시간이 지나야 했지만, 미국정부의 한국 독립 결정으로 연결됐다는 것이다.

한편,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김명구 교수 외에 오일환(한양대)ㆍ박명수(서울신대)ㆍ윤정란(서강대)ㆍ이은선 교수가 각기 ‘3·1 운동, 미국, 그리고 기독교’, ‘태평양전쟁 시기 이승만의 대미 외교활동에 미친 제랄딘 피치의 역할’, ‘1960년대 한미 관계에서 기독교의 역할: 미국 선교사 제임스 레이니의 한국 활동을 중심으로’, ‘1970년대 한미 관계와 민족복음화운동’을 주제로 발표했다.

▲ 세미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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