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로고스로서의 말씀’ 넘어서 '레마' 받아야···해석학적 우상숭배되나?

왕의 음성인가, 내가복음인가?

‘내가복음’이란 말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하고는 ‘복음’을 붙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다. <왕의 음성>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말하면서도 결국은 내가복음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내가 들은 음성’을 강조하는 저자들은 성경까지도 그 본의와는 상관없이 그냥 내가 좋아하고 깨달은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포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책 전장에 걸쳐 강조하면서 성경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뿐 아니라, 환상, 꿈, 대면·대화 방식 등 직접 음성듣기를 언급할 뿐 아니라 성경의 중요성 또한 역설한다는 것이다. ‘제 4장 기록된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다’(121페이지)에서 그 부분이 특히 강조된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시고, 그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을 기록하신 목적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분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124페이지)고 주장한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멋진 표현이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누가 문제 삼을까? 독자들은 이런 요소 때문에 <왕의 음성>이 신앙에 유익이 된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자. 저자가 성경 말씀을 강조하면서 끝까지 내려놓지 않는 게 있다. 저자는 성경의 본의를 살피고 고민할 것을 말하기 보다 성경을 통해 ‘내게 말씀하시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왕의 음성>이 갖고 있는 문제는 ‘내가 깨달은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단정한다는 점이다. 결국 저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과연 저자들은 ‘왕’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려는 진지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인가? 의아해지기까지 한다. 다음 글을 보자.

▲ 왕의음성 167페이지 내용
    
“말씀 묵상할 때 좋은 질문이 필요하다. ‘성령님,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제게 말씀하소서.’ 그러고 나서 말씀을 천천히 읽는다. 처음에 읽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다시 읽는다. 그러다 어느 한 단어, 한 구절, 한 단락에서 마음에 무언가 주어지는 게 있다. 마치 누가 옆구리를 콕 찌르듯이, 아니면 살짝 어깨를 두드리듯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게 있다. 이 구절을 통해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 부분에 집중하여 처음의 질문을 다시 하라. ‘주님,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제게 말씀하소서.’ 성령께서 지금 내게 응답하는 중이다.”(167~168페이지).

“내게 감동이 되는 말씀이 있다면 주님이 내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주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이다.”(168페이지).

성경을 읽다가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 있다면 그건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인 구절에 집중해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제게 말씀하소서”라는 부분에 이르면 고개가 절래 절래 저어질 수밖에 없다. 내 마음에 ‘콕!’찌르듯 다가온 말씀은 주님이 내게 말씀하는 것이며, 그 기록된 말씀, 사실상, 내 옆구리 찌르듯 콕 다가온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를 ‘레마’라고 표현한다(128페이지). 그 레마의 말씀에 집중해 다시 보고 또 보는 방식이 저자들이 추구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을 통해 성경의 본뜻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들은 내게 ‘콱’하고 꽂히는 말씀에 집중하는 황당한 방법을 아주 당당하게 제시한다.

이런 깨달음을 하나님의 음성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근거에 대해 저자들은 성도의 내면에는 ‘새 영’, ‘영’이 부어졌기 때문에 그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니 성령의 음성을 영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 삼분설(여기서 삼분설의 문제점은 거론하지 않겠다)에 근거해 사람이 영·혼·육으로 구성됐다(180페이지)고 하고는 이 중 ‘영’이 하나님과 교제할 때 필요한 기능이라고 한다(181페이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내 영을 통해 알려주신다는 것이다(182페이지).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처럼 내 영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190페이지).

즉,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한다 -> 성경을 읽으며 내게 주시는, 옆구리 찌르듯 ‘콕’하고 다가오는 말씀(레마)을 찾는다 ->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음성이다 -> 이것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관인 ‘나의 영’으로 깨달아진다는 4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방식이다.

▲ 왕의음성 171페이지 내용
   
조금 더 살펴보자. 저자는 “성경을 읽을 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오늘 내게 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124페이지)고 주장한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내게 하시는 말씀의 내용에 귀를 기울인다”(125페이지), “믿음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거나 들을 때가 아니라 내게 개인적으로 하시는 그리스도의 레마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130페이지), “성경을 대할 때마다 ‘성령님,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제게 레마로 말씀해주소서’라고 요청해야 한다”(138페이지).

일견 옳게 보이는 요소가 있긴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이유, 문장을 통해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지,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맥락, 시대적 배경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게 핵심이 아니라 ‘내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말씀’이, 저자들이 추구하는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핵심이다.

“성경을 대할 때 우리가 무엇보다 집중해야 하는 건 성경의 내용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관점을 살피고, 내게 말씀하시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다.”(124페이지). 결국 ‘왕’이 아니라 ‘나’ 개인이 중심이다.

진정 왕이 말씀한다고 쳐 보자. 그런데 그 왕이 말하는 전체적 메시지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내 마음에 ‘콕’ 들어오는 말에 집중하는 신하가 있다면 그는 왕과 인격적으로 교류하는 참된 ‘왕의 신하’인가, 아니면 왕의 위엄과 권위를 무시하는 신하인까?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속내는 여기저기 조금씩 드러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음성을 들을 수 있다던 그들은 결국 ‘문자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도 수차례 강조한다.

“아이 사무엘 당시에 말씀이 희귀했다는 의미는 이와 다르다. 성경책도, 성경공부하는 그룹도,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도 있었지만 문자를 넘어서서 지금도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62페이지). 사무엘의 시대 상황을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었지만 ‘문자를 넘어서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고 전혀 해석학적으로 맞지 않는 얘기를 한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진리를 가르치시는 걸 넘어서서 진리를 만나게 하신다. 문자를 넘어서서 레마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다.”(139페이지). 자꾸 문자를 넘어서서라고 강조한다.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을 넘어서서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레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171페이지).

▲ 왕의음성 139페이지 내용
결국 저자들에게 ‘문자’, ‘로고스로서의 성경’은 넘어서야만 하는 무엇인 거였다. 저자들이 과연 기록된 성경말씀을 ‘왕의 음성’으로서 귀하게 받아들이려는 겸손한 마음이 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결국 저자들이 <왕의 음성>에서 지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나’다. ‘나의 깨달음’, ‘내게 들려온 음성’이다. 문자를 넘어서서 내 옆구리를 ‘콕’찌르듯 다가오는 나의 감동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포장을 하라고 독려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내게 주시는 깨달음이 없다면 그날 하나님은 내게 아무런 말씀도 안하신 걸까?권연경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는 큐티의 귀함과 소중함을 전제하면서도 ‘내게 깨달음을 주는 구절을 찾는’ 큐티식 성경묵상의 가장 큰 문제로 ‘해석학적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성경읽기를 굳이 구분하자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읽기도 있을 테고, 기본적으로 이해한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지금 나에게 적용하는, 보통 우리가 큐티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작업을 한 후에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슨 말씀을 주셨나. 그걸 찾고 싶은 거거든요. ··· 제가 쓰는 표현 중의 하나가, 큐티는 사실, 아주 긍정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통해 나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그 메시지를 통해서 지금 내 삶에 필요한 말씀을 받는 것은 지극히 긍정적인데, 우리가 성경을 읽고 적용하려면, 하나님께서 직접 내 귀에 대고 속삭여 주시는 말씀이라면, 그냥 ‘네!’하고 적용하면 되는데, 2천년 전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갈라디아교회의 사람들에게, 거기에 문제가 있어서 할례와 관련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쓴 편지가 갈라디아서예요. 그걸 내가 큐티를 한단 말이죠. 그걸 지금 나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이상한 오해가 생기겠죠.

그래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느냐 하면 기본적으로 원래 맥락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하고, 그리고 나서 그러면 그 메시지가 지금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를 따져야겠죠. 그런 절차가 귀찮잖아요. 귀찮으니까 어떻게? 그러니까 바로 내게 주시는 말씀처럼 읽고 싶은 거죠. 본래 맥락을 무시하면 자기 마음대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문제예요. 이게 그냥 사적 대화 같으면 자기가 좀 오해해도 괜찮지만, 문제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하는 거거든요.

결과적으로 조금 어려운 표현을 쓰자면 제가 ‘해석학적 우상숭배’라는 표현을 써요. 결과적으로 뭐가 되냐 하면 자기 생각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키는 거죠. 왜냐하면 성경을 읽었는데 그걸 내 마음대로 읽었어요. 그런데 어쨌든 그걸 내가 성경을 통해 메시지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내 생각인데.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가 입혀지잖아요.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거죠. 결국은 우상숭배가 되는 거죠.”(권연경, '큐티(QT)식 성경읽기는 문제가 되나요?‘, CBS 낸시랭의 신학펀치, 2014년 2월 12일).

QT는 매우 귀한 신앙행위이지만 말씀을 읽으며 마음을 콕 찌르는 구절과 단어에 집착하다보면 자칫 성경의 본의와 맥락은 무시한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그것은 내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입히는 ‘해석학적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지적이다.

저자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기록된 말씀인 ‘로고스’와 내가 깨달은 말씀 ‘레마’로 구분하며 기록된 말씀, 로고스, 즉 ‘문자’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로 성경 자체의 권위보다 내가 깨달은 말씀의 권위를 수시로 높인다. 문자를 넘어서라? 저자들에게 로고스인 성경은 넘어서야 할 산인가? 벽인가? 울타리인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저자들이 워낙 레마를 강조(128페이지~171페이지까지, 거의 43페이지 분량을 로고스와 레마에 대해 설명한다)하니 성경이 과연 저자들의 말처럼 로고스와 레마로 날카롭게 구분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헬라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저자들의 말처럼 로고스와 레마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주장처럼 기록된 문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라는 단어만 사용한 건 아니다. 반대로 나에게 주어진 말씀, 깨달은 말씀을 뜻할 때도 레마라는 단어만 사용한 건 아니다. 때로 이 두 단어는 교차 사용하기도 했다. 다음 글을 살펴보자.“로마서를 본문으로 문제를 한 번 만들어 보았다. 문제3) 다음 로마서 각 구절 중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해 보시오.

〚롬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롬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면 네 마음에 있다 하였느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

말씀이라는 단어가 모두 6개다. 어떤 것이 로고스고 또 어떤 것이 레마일까? 정답은 10장의 말씀은 모두 레마고 9장은 모두 로고스다.

결론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성경에 쓴 ‘말씀’을 로고스와 레마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이 스스로 지지해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로고스와 레마를 특별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이들의 구분법에 따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기록된 말씀이라는 의미처럼 보이는 ‘말씀’이라는 성경구절에 로고스와 레마가 섞어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레마)을 가지라.”
레마가 일반적인 ‘말’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마 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레마)마다 증참케 하라.”

로고스와 레마가 한 문장에 동시에 사용된 재미있는 예가 있다.
행 10:44 “베드로가 이 말(레마)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와.”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위 행 10:44의 로고스와 레마는 순서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성경적 예가 얼마든지 있다. 성경이 이 두 용어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로고스와 레마라는 단어를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 용례도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두 용어를 구분하여 다르게 사용하려는 것은 비성경적인 행위다. “레마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옳지 않다. (장운철, 교회와신앙, ‘레마사상, 여전히 우리 주변에?’, 교회와신앙, 2011년 2월 11일, 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80).  [계속]

[본지 제휴 <기독교포털뉴스. 제공]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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