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계 10월호] ‘80대 현역’ 한국중앙교회 최복규 원로목사

전후 한국교회의 성장을 이끌었던 1세대 부흥사로 민족복음화와 세계 선교에 헌신하며 반세기 이상 사역해 온 최복규 목사. 은퇴 이후 83세가 된 올해에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그를 <신앙계 10월호>가 만났다.


1934년 4월 6일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내강리에서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정치학도를 꿈꿨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 서울 금호동 그루터기의 척박한 땅에 베다니교회(현 한국중앙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한국중앙교회로의 거듭남을 통해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에 앞장서며 한국교회에 부흥의 바람을 일으킨 그는 1956년 대구신학교(현 대신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복음신학교(현 한세대학교), 칼빈신학교(현 칼빈대학교), 대한신학교(현 안양대학교),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서울신학대학원 등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다양한 학교에서 공부를 했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각 교단이 왜 나뉘고 갈렸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제가 깨닫게 된 것은 교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누가 총회장이 되느냐로 싸우면서 갈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진리가 아니면 모두 양보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스스로 그런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자 살았습니다.”

최복규 목사는 ‘겸손과 청렴의 목회자’로 불린다.  신학을 마치고 처음 부임지로 추천 받은 곳은 대도시의 중형교회였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교회, 성도가 거의 없는 교회에서 개척을 하겠다는 다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전남 구레에 목회자들이 외면하는 곳에 가겠냐는 제안이 있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다. 막 신혼살림을 시작한 아내와 완행열차 편으로 10시간 만에 도착한 교회는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전기는 물론 물도 없는 산중턱에 위치한 교회와 사택은 짓다가 중단된 상황이었다.

“우리 내외가 그 교회에 갔을 때는 전 주일에 전임 교역자가 떠났고, 성도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인 채로 겨우 7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낮이면 심방과 전도로, 밤이면 기도로 사역한 끝에 부임 100일만에 기도의 응답으로 성도수는 10배인 70명으로 늘었고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됐습니다.“

1962년 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삼각산에서 금식하며 기도한 지 3일만에 교회개척의 비전을 받고 내려와 그해 8월 19일 금호동의 빈민촌에 베다니교회(현 한국중앙교회)를 개척했다.

최복규 목사와 한국중앙교회가 최초로 전개한 운동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헌혈운동’이다. 병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빈민촌의 환자들을 외면할 수 없어, 피 한 병이면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을 구하고자 최 목사는 자신이 먼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피를 뽑았다.

이렇게 시작한 헌혈운동은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과 사회가 참여하는 운동으로 확산됐고, 한국헌혈운동본부가 설립되는 동기가 됐다.

이후 이 운동은 골수기증운동, 장기기증운동, 안구기증운동 등으로 확산되는 주춧돌이 됐을 뿐 아니라 각 병원들에 원목제도가 도입되는 성과를 거뒀다.

“아직도 기도응답이 안된 것이 있다면 바로 통일입니다. 저는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주여, 전 세계를 메주 밟듯 다니며 복음 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북한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대동강변에서 통일대성회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중입니다. 이것도 곧 응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과 건강으로 80대 현역임을 내세우며 여전히 왕성하게 사역하고 있는 최복규 목사의 마지막 바람이다.

[최복규 목사 인터뷰 전문은 <신앙계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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