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ㆍ아펜젤러 한국 도착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이전으로 당겨

128년전 부활절인 1885년 4월 5일은 미국의 복음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한국에 도착한 날이다. 한 때 한국교회는 이 날을 한국 (개신교)교회사의 기원으로 삼았다. 하지만 1986년 발견된 한 통의 편지가 이를 뒤집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펜젤러ㆍ언더우드 도착 한 달 여 전에 작성된 편지

지난해 3월 한국 교회사의 기원과 관련 흥미 있는 연구발표회가 있었다. 한국교회발전연구원의 ‘한국 개신교의 기원 언제로 잡을 것인가’에 대한 발표회가 그것이다. 한글성서가 번역된 시점인 1877년인가 아니면 두 선교사가 입국한 1885년인가가 그 핵심이었다.

이러한 논의가 가능했던 것은 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만주 등에서 성경의 일부가 한글로 번역돼 한국으로 들어왔고 이 번역 성경이 민중들 사이에 퍼져가면서 기독교 신자가 생겨나게 됐는바 이를 한국 기독교의 기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서가 지난 1986년 영국 켐브리지대학교 중앙도서관 안에 있는 대영성서공회 고문서실에서 발굴돼 학계에 소개됐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역사학자 이만열 교수에 의해서다.

이 편지는 다음달 6일 예정된 한국장로회신학회 주최 ‘한국어 성경번역의 초기 역사와 한국 교회’라는 제목의 학술회의에서 이 교수에 의해 다시 한 번 소개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이 편지 내용이 최근 이만열 교수의 페이스북 게시 글을 통해서 공개됐다.

이 편지는 서상륜, 이응찬 등과 함께 한글성서 번역을 주도한 로스 선교사(John Ross, 羅約翰)가 1885년 3월 8일자로 대영성서공회 총무에게 보낸 것으로 두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날(1885년 4월 5일 부활절)보다 약 한 달 앞선다.

서상륜 2년 노력 결과 세례청원자 70명 넘어

다음은 이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편지 내용이다. (편집자 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 기독교의 기원과 관련된 내용은 밑줄로 표시했다.) 

“귀하께서는 작년(1884년) 보고서의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인 이 곳(봉천)에서 인쇄된 복음서들과 소책자들이 읽혀진 결과들에 대해서 브라이언트(E. Bryant: 당시 대영성서공회 중국지부 총무) 씨로부터 전해 들었을 줄로 생각합니다.

기왕에 세례 받은 자 외에 현재 한국 계곡(Corean Valleys: 당시 3만여 명의 조선인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에 집단으로 거주했던 28개의 마을)에는 600명이 넘는 남자 세례청원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관해서는 5월(1885년)로 예정된 저의 그곳 방문 후에 보다 자세히 보고 드리겠습니다.

자신의 모국어로 자기 이름을 ‘Hu’ 혹은 ‘Swi’로 쓰는 한국인(서상륜)은 세례 받은 지 6개월이 지난 후 자신의 본국 수도를 향해 떠났는데, 그곳 서울에서 귀공회의 권서로 일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자주 편지로 저를 서울로 초청하였으나 최근에는 직접 이곳으로 와서 보고하면서 저를 초청하였습니다.

그가 2년 동안 노력한 결과로 현재 70명이 넘는 세례청원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몇 명은 주목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 중에 한 명이 세례받기 위해 함께 이곳으로 왔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서울의 서쪽에 있는 한 도시에 ‘설교당’(Preaching Hall)을 개설하였고 그곳에 18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서울 남쪽의 한 도시에 있는 다른 한 개종자는 ‘20명 이상’의 세례청원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로스역 성경 보급한 권서들 한반도 안팎에서 활동한 결과”

이만열 교수에 의하면, 로스는 1882년 3월과 5월에 봉천 문광서원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3천부씩을 간행했고 그 후 김청송이라는 사람을 통해 만주 지역의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결과 1884년 겨울에 75명, 1885년 여름에는 25명이 세례를 받게 됐었고, 이 무렵 세례청원자는 아직 600여명이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로스는, 세례 받은 지 6개월이 되는 서상륜을 1882년 10월 6일 권서(성경책 판매인)로 삼아 서울에 보냈는데 그 후 2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1885년 초에 심양으로 돌아와 그 동안의 서울 사역을 보고하기에 이를 편지를 통해 대영성서공회 총무에게 보고했다.

편지와 관련 이 교수는 “놀라운 것은, 서상륜의 일터였던 서울에 70명의 세례청원자가 있고, 서상륜과 함께 봉천으로 온 사람에 의하면 서울 서쪽에 있는 한 도시에 ‘설교당’(Preaching Hall)을 개설하여 18명의 신자가 모이고 있으며, 서울 남쪽의 한 도시에도 ‘20명 이상’의 세례청원자가 있다고 보고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 교수는 이러한 복음 증거의 열매와 관련 “이는 로스역 성경을 보급한 권서들이 한반도 안팎에서 활동한 결과요, 하나님의 말씀이 초기 한국 사회에 보여준 역동적인 힘”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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