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 지음 | 『돌봄의 영성』
두란노 | 2014년 2월 17일 | 127쪽 | 8,000원

『돌봄의 영성』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헨리 나우웬이 돌봄에 참여한 경험을 담아 쓴 책이다. 그는 대학 교수직을 돌연 그만두고 발달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아담 아네트라는 형제를 돌보게 된다. 그렇게 그의 앞에 돌봄의 세계가 열린다.

돌봄의 재조명

흔히 돌봄은, 장애인을 돌보는 비장애인,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처럼, 노약자에게 직접적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관련된 단어라고 생각된다. 나우웬이 아담을 돌보았듯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돌봄은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는 주제인 듯하다. 본인과 상관없다고 느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돌봄은 인간에게 있어 아주 중요하다. 아니, 아주 중요함을 넘어 필수적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돌봄을 받았고, 병과 노화를 겪으며 돌봄을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 역시 돌봄에 참여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다. 그는 아주 과감하게 돌봄의 가치를 피력한다. “돌봄은 인간의 모든 몸짓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돌봄의 확장

이렇듯 돌봄의 일차적 의미는 약자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거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누구나 돌보는 자가 될 수 있다. 교회에만 한정해서 보더라도, 목회자나 리더는 물론이고, 식당에서 밥을 하고, 미디어 팀으로 예배를 돕고, 차량 안내를 하는 것 역시 공동체를 돌보는 행위다. 이렇게 확장해 본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여러 일 역시 돌봄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돌봄은 쉽게 넘길 주제가 전혀 아니다.

헨리 나우웬의 생각 역시 그러한 것 같다. 책에 나오는 돌봄의 정의를 옮겨 보자. “돌봄(care)이란 무엇인가? 이 말의 어원인 ‘kara’라는 단어는 ‘슬퍼하다, 애통하다, 고난에 동참하다, 고통을 나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돌봄이란, 병들고 혼란스럽고 외롭고 고립되고 잊힌 사람들과 함께 부르짖는 것이다. 즉, 그들의 고통이 내 마음속에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돌봄이 필요한 사람과 그 순간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 내 주위의 고통받는 사람, 사회적으로 연대가 필요한 사람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헨리 나우웬만의 생각이 아니다. 사회학과 교수 백영경은 돌봄을 이렇게 정의한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가진 굉장히 구체적인 필요에 대한 응답, 좋아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저버릴 수 없어서 하는 응답, 앞에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이고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인정”이 돌봄이다.

고난에 동참하는 것,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부르짖는 것, 이를 가리킬 때 ‘연대’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앞서 인용한 돌봄의 정의 두 가지를 헤아려 본다면, 연대와 돌봄 사이에는 긴밀한 관련이 있음이 선명해진다. 헨리 나우웬이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이 점을 더 부각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이루는 능력일 것이다.”

▲『돌봄의 영성』 표지, ⓒ두란노
▲『돌봄의 영성』 표지, ⓒ두란노

돌봄을 넘어

돌봄의 확장과 더불어 돌봄을 이야기할 때 고려해야 할 두 가지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돌보는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다. 나우웬은 돌보는 자와 돌봄받는 자의 일대일 관계에 주목하여 돌봄의 영성을 풀어낸다. 이때, 그가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돌봄은 일방적 시혜 관계가 아니라, “약한 사람[돌봄받는 자]과 강한 사람[돌보는 자]이 서로 조우하는 쌍방적 관계”다.

그러나 오늘날, 특히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우리가 보게 된 것은, 돌보는 자들은 결코 “강한 사람”, 즉 ‘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취약한 노동자들이었다. 간병인만이 아니라, 학교 교사, (주로 엄마로 대표되는) 양육자 등, 일대일의 관계에 한정하면 시혜의 관계로 보일 수 있으나, 사회 전체의 맥락 속에는 그렇지 않은 돌보는 자들이 있다. 이 맥락을 떼어 놓고 돌봄의 관계를 이해해서는 안 되겠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돌봄을 제공하는 자로서만 이야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직접적인 돌봄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돌봄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기가 어렵다. 헨리 나우웬 역시 이 책에서 주로 돌보는 자를 향해 말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돌봄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의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건강한 관계라면,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돌봄은 분명 상호적일 것이다.

또한 이것은 사람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지구’와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기독교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창세기 이야기를 가져와 자연을 개발하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창조 세계를 돌보는 책무를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인간은 자연과 구분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연 위에 서서 그것을 돌보는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연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돌봄의 영성이 필요한 만큼 의존의 영성도 필요할 것이다.

너희 아버지의 돌보심같이

돌봄이 왜곡되지 않고 잘 작동하려면 앞서 언급했던 세 가지 차원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 돌봄이라는 넓은 인식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는 돌보는 자일 뿐 아니라, 서로와 이 세계에 깊이 의존하는 자라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럼에도 돌봄의 최전선에서 노동하는 이들의 모습이 가려져서는 안 될 것이다.

책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제사에는 누가복음 6장 36절이 인용된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어라.”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렇게 다시 써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너희 아버지의 돌보심같이 너희도 돌보는 자가 되어라.’

박예찬 IVP 편집자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3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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