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R. P. 캐럴은 예레미야서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예레미야서가 역사 속 실제 예레미야에 대한 주요한 정보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본문 자체가 이미 성서 저자에 의해 상당히 해석된 정보이기 때문에, 그 자료가 얼마나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지는 미심쩍다고 말한다. 결국 일반 독자는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만들어진 해석을 접하는 것이고, 예레미야서를 통해 얼마만큼 예레미야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지는 미지수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 신앙인이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역사적 예레미야를 사실 그대로 재구성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지, 굳이 역사 속 예레미야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성에 관하여는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그저 본문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예레미야서에는 주인공 예언자의 전기적 내용이 다른 예언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 그래서 한때 학자들은 예레미야서를 통해 예언자 개인의 역사적 정보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에 낙관적이었다. 그러나 캐럴은 반대다. 예언자 자신이 직접 내뱉었던 말(ipsissima verba) 자체를 찾을 수 없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 가능성을 운문체 본문 일부로 한정한다. 찾을 수 있어도 다양한 편집자들에 의해 현재 형태로 재구성되었기에, 이를 통해 예레미야 본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우리는 예레미야 본래의 내면에 그렇게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것을 편집자가 재구성했다고 해도, 우리 눈앞에 있는 최종 본문을 있는 그대로 무오하고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온전히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역사 자료란 없다. 어떤 일이 발생하여 1초만 지나도, 그 사실은 인지자에 의해 해석되어 남겨지는 하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겨레와 조선일보를 서로 비교해 가며 읽는다. 마찬가지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나오는 다윗-솔로몬을, 역대기에 그려진 그들의 기록과 비교하며 읽는다. 이미 성경은 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해석을 제시한다. 예수님의 기록은 심지어 네 권의 복음서가 다룬다. 성서 스스로가 독자를 비평으로 인도한다.

예레미야서에는 분명히 몇 차례 편집 과정이 있었다. 신명기적 사고 패턴이 두드러지고 반복되는 이야기도 많다. 특히 예레미야 고유의 것으로 여기는 그의 ‘고백’들은 특정 시편이나 욥기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형태로 예레미야서를 형성한 이들은 그 저술 목적을 어디에 두었을까? 아니, 이러한 편집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때 나의 지도 교수님은 신심이 있었지만 성서의 역사성에는 매우 회의적인 분이셨다. 마침 학교에 당시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던 스칸디나비아 쪽 교수님 한 분이 방문하셨다. 지도 교수님은 주변의 대학원생들과 학자들을 긴급 소집하여 그분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방문 교수님은 최소주의(minimalism) 역사관을 지닌 분이라서, 구약은 대부분은 헬라 시대에 적혀졌으며 심지어 이스라엘 포로기도 허구적이라고 하셨다. 이후 참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출애굽 정도는 가볍게 허구로 여기던 지도 교수님이 갑자기 열띤 목소리로 포로기가 허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굳건한 보수주의로 돌변하신 것이다. 사실 초대되신 교수님도 알고 보니 좋은 신앙인으로서 많은 선행을 실천하는 분이셨다. 보수적인 한국의 신학 풍토에서 자라온 나에게는 참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예레미야서는 유다 왕국이 몰락하던 몇십 년과 예루살렘 파괴, 유다 사람의 추방이 그 역사적 배경이다. 약 기원전 6세기에 주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포로기는 혼돈의 시간이었지만 이스라엘이 과거와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계획했던 가장 알찬 시기였다. 구약의 문헌이 열띠게 발전했던 황금기다. 이 시기의 역사가는 왜 나라가 붕괴했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 책임이 있는 정치와 종교 지도자를 신랄하게 비판해야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 역사가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집어 들어 그의 예언서를 형성했다고 캐럴은 설명한다. 즉 어떤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예레미야서의 여러 본문이 형성되고 발달했다는 것이다.

어느 역사 기록이든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없을 수 없다. 심지어 사적인 일기도 사실의 기록이기보단 본인 나름의 해석과 성찰이다. 그래서 교과서나 <한산> 같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이순신 장군과 역사학자가 비평한 이순신은 서로 결이 다르기도 하다. 각자가 이순신을 제시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애국심을 고취해 국민의 사기를 올리려 했던 1960년대, 이순신은 영웅 중의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실보다는 메시지가 중요했고, 국민은 행복했다. 이순신 신화를 비평하는 역사학자의 논지는 일리가 있지만, 썩 기분이 좋지 않다. 사람은 결코 팩트에 행복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로망에 행복해한다.

그래서 이사야서나 호세아서와는 달리,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에는 그들의 소명 설화가 책 앞에 제일 먼저 나온다. 나라가 몰락하고 흉흉했던 포로기 때, 예언자들의 예언적 권위는 늘 도전을 받았던 모양이다(렘 23:9-32; 겔 13; 14:1-11). 이 시기에는 예언자의 신적 권위가 든든히 보장되어야 말이 먹혔다. 예레미야의 말을 거칠게 담은 것도 이유가 있다. 캐럴은 그 강한 언어가 있는 그대로 진실이기도 하지만, 문학적 기술이 가미된 표현으로 본다(렘 5:1-5, 23; 6:13; 8:10; 9:2-6). 이유는 포로기 때 강한 신정론(神正論)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몰락과 파멸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타락과 죄악이 강조되고 강하게 비판받아야만 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때 걱정이 많았다. 한국서 강의하다 보면 늘 성서의 역사성 문제와 관련하여 끝없는 변증만 하며 살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 그러했다. 지금은 능구렁이가 다 되어 학생들을 심란하게도 하고 속 시원하게 하기도 한다. 과학의 시대에 교육받고 자라온 우리는, 과학의 혜택도 받고 부작용도 만만치 않게 앓는다. 진리는 논리 실증적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전혀 옳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의 로망을 오염시킨다. 그러한 생각은 근본적으로는 반신앙적이다. 진리는 실증되지 않아도 진리임을 믿는 것이 믿음(faith)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는 결코 역사적 예레미야를 논리적으로 실증할 수 없다. 예레미야서를 완벽히 객관적인 역사물로 여겨야만 마음에 안정을 얻는 것은, 신앙이 좋아서가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에 길들어서다. 예레미야서가 역사적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못한다며 폄하하는 사람은 신앙이 모자란 바보다. 회의적인 나의 지도교수도 스칸디나비아의 최소주의자도 그러진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자. 과학의 시대가 몰아낸 것만 같았던 신화적 세계관이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올 것이다.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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