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3선 개헌 시도 때부터 권력에 대한 대응에서 견해 차 ‘뚜렷’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사에서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뚜렷하게 되는 것은 1968년 박정희의 3선 개헌이 시작되면서부터입니다.”

▲ 14일 기독교회회관 7층예배실에서의 '교회와 민족' 특강에서 강연 중인 이만열 교수

‘한일국교정상화’에는 한 목소리로 “반대”

한국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정통(보수)신학 진영과 자유주의 신학 진영으로 크게 대별되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으로 나뉜다.

신학적 정통(보수)과 자유주의 구분은 1947년부터 시작된 신학적 논쟁 끝에 1953년 김재준 박사의 파면으로 장로교가 분열된 시점으로부터 고착됐다는 게 한국교회사의 정설이다. 그러면 정치적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언제부터일까?

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게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의 진단이다.

이 교수는 지난 14일 진행된 ‘교회와 민족’ 특강에서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사에서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뚜렷하게 되는 것은 1968년 박정희의 3선 개헌이 시작되면서부터라고 주장했다. 그 전에는 한국교회가 예언자적인 한 목소리로 박정희 정권과 대립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비해서 해방직후 기독교계는 민족운동다운 민족운동을 펼치지 못했다”면서 “기독교가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은 1960년 4ㆍ19와 그 이듬해 5ㆍ16 군사 쿠데타를  게기로 자기반성이 일어나면서”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어 “박정희 군사정권과 기독교계의 대립이 뚜렷해진 것은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고 덧붙였다.

군사정권 하에서 이렇다 할 비판세력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국교회가 분연히 일어나 굴욕외교에 항거했다는 것이다.

한일회담에 대한 기독교계의 비판은 1964년 2월부터 시작해서 1965년 6월 22일 조인을 앞둔 시기에는 영락교회의 연합기도회로 발전했다. 이 열기는 7월까지도 계속돼, 반대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고 금식기도회로 모여 반대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합동 측의 승동교회와 평안교회 등이 움직인 것을 보면, 한일회담 반대운동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3선 개헌 때 ‘분열’돼 유신정권기에 ‘노골화’

이렇게 한 목소리를 내던 한국교회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시도하면서부터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이때부터 한국교회에 권력에 대한 대응에서 견해차가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1968년 8월 김재준ㆍ박형규ㆍ함석헌 등 진보적 인사들이 ‘3선개헌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 8월 15일에는 반대 성명서를 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일 조용기ㆍ김준곤ㆍ김장환 등 보수측 인사 242명이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을 발표, “함석헌 등의 성명서가 ‘순진한 성도들의 양심이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라고 비난함과 동시에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했다.

사흘 뒤인 9월 5일에는 한기총의 전신인 ‘대한기독교연합회’를 만들어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을 발표하고 3선 개헌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이 교수는 “이를 게기로 한국 기독교계는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서로 냉소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 진영의 갈등은 1970년대 유신정권 하, 인권ㆍ민주운동기에 더욱 노골화돼 사회문제가 이슈화될 때마다 신학적인 입장이나 신앙적인 고백을 조율하지 못하고 거의 협력하지 못하고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이 교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신학적 입장이나 신앙적 고백의 조율을 못함은 물론, 더러는 이념적인 편향성을 노출하기도 하고, 더러는 계급적 성향이나 지역성에서 편가르기를 노골화한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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