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아멘교회 송영춘 목사의 목회 수상(隨想) (15)

 

유난히 편치 않아 보이는 안색을 보며 친구에게 물었다.

“자네 부인 안색이 오늘 썩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어?”

“응 집사람 오랜 친구가 속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는데 암이래, 그런데 너무 늦었다고 한 달 정도 보라고 했데.. 오늘 거기 갔다 오더니 마음이 안 좋은가봐..”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로 그 여인의 호스피스 병실을 찾았다. 성찬을 베풀 작정이다. 다행인 것은 20대 때에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았다기에 베풀 수가 있었다.

마지막 며칠 동안에라도 예수님을 알게 하고 싶은 마음에 지난주에 처음 찾았었고, 그 때 성찬을 받고 싶은지 묻는 내 물음에 좋다하여 이루어진 일이다. 지난주라 해도 닷새 만인데 전혀 딴 사람처럼 수척해져 있다.

이틀 만에 다시 찾은 여인은 의식이 없다. 오늘은 단단히 내 주님을 좀 더 알게 하고 싶었는데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다. 지난 주 친구 아내의 안색을 살피고 자진해서 이 병실을 찾은 지 정확히 일주일 만이다.

일주일 전만해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누구에게 따지는지 모를 소리지만 제법 큰 소리로 하소연 하던 여인인데…

불과 일주일 만에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뒤로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왕복 150km다. 이 먼 거리를 오가며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시간 내내 우리네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새삼 생각했다.

많이 가졌어도 마지막은 철저하게 빈손이다. 많이 배워 넘치는 지식을 소유했다 하여도 인생의 마지막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찾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단련을 하여도 마지막을 뚫고 지나 갈 수는 있는 힘은 기르지 못한다. 많은 인기를 누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다 하여도 마지막은 철저하게 버려지는 혼자만의 길이다.

이 사실을 일찍이 알아차린 허무주의자들은 인생을 단지 지금과 이 생에 국한시키려 한 것인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전혀 다른 모습이 있다.

지난 삶의 무게의 고통을 그래도 드러내는 모습.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다하지 못한 후회의 모습. 자기 열심을 바탕으로 한 원망의 모습. 그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잡으려는 갈등의 모습..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전혀 다른 모습이 있다.

남겨진 자들의 안녕을 구하는 모습. ‘참 수고 했다’는 자찬의 모습. 혼자만 볼 수 있는 숨겨진 길을 발견한 감격의 모습. 자신의 영혼을 따스한 손에 맡긴 평안의 모습.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전혀 다른 모습이 있다.

과거에 집중하는 모습. 전혀 다른 새로움을 기대하는 모습.

저작권자 © 뉴스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