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아멘교회 송영춘 목사의 목회 수상(隨想) (14)

 

신념은 공식이다.

공식인데 어떤 변화의 수를 대입 시키더라도 값은 언제나 같다. 값이 한결같이 한 가지를 가르키기에 신념이 되는 것이다.

신념은 절대적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현실적 사실을 바탕으로 키워지지만 진실, 진리의 진위는 가리려 하지 않는다.

신념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껏 지켜왔던 시간과 열정의 상실감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기 정체성의 자괴감이 두렵기 때문이다.

특히 오류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신념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1983년 가을 어린 나이에 시작한 의류사업은 시쳇말로 떼돈을 벌었었다.

당시 9급 공무원의 한 달 월급으로 가름했을 때 거의 삼 년치를 단 하루에 벌었었다. 매일 같은 수입은 써도 끝이 없이 쓸 수 있었다.

그 때 내게 생긴 믿음이 있었다.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내 아버지의 회심이 나의 축복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승승장구의 시간이 거듭될수록 그 같은 믿음은 신념이 되어갔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의 회심이 내게는 언제나 축복으로 보상되리라는 확고함 때문이었다.

어느덧 신념이 신앙이 되어버렸다. 마치 보답이라도 하듯, 그리고 더 많은 축복을 기대라도 하듯 열심을 가장한 자기만족의 신앙생활은 또 다른 모습의 신념을 만들고 있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신앙의 모습으로 신념은 나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어리석게도…

신념이 신앙의 모습과 결탁하면 가장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신앙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과 신념은 뚜렷한 차이가 있다. 신앙은 어떤 일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신념은 그 결과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상관없이 결과를 예측하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은 평화를 주는데 신념은 위로를 준다. 즉 신앙은 신과의 관계의 회복을 통한 화평을 주는데, 신념은 ‘하면 된다’는 막연한 희망과 자기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신과의 관계, 신뢰, 순종을 통한 승리를 주장하는데.

사이비 종교 집단은 자기 확신을 통해 위로를 가장한 신념을 주려 한다.

신념을 주려 하는 집단이 있다면 모두가 우상을 숭배하는 사이비 집단이라 해도 좋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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