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아멘교회 송영춘 목사의 목회 수상(隨想) (12)

 

정의(正義)는 정의(定義)가 없는 것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이 정의라 인정’하면 정의가 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라고 인정해야 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옳바른 가치관과 편견 없는 정도(正道)가 필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다수의 의견이 악(惡)도 정의(正義)라고 합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正義)는 약속이다. 인간 사회 전반에 걸친 묵시적 약속이다.

사회가 건강하고 건전하기 위해서는 ‘정의’의 범주에 바른 도덕적 가치관과 윤리적 가치관 그리고 공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는 다수의 약속을 누구라도 깨거나, 임의로 바꾸거나, 사람에 따라 적용 범위를 변경하려는 의도가 없는 사회를 말한다. 무엇보다 억지스러움이 없어야 한다.

억지 없이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들이 모여서 정의로움을 이루는 것이다.

‘막무가내’는 자신의 뜻과 의지만 고집하고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행동을 말한다. 이 행동은 타인의 판단을 고려하지 않는다. 동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판단만이 과정과 결과의 요인이 될 뿐이다.

‘막무가내’식의 행동은 미성숙한 인성과 지성에서 오는 것 같다. 마치 아이들이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결국 손에 넣기 위해서 상가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는 것처럼..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눈총은 받을지언정 그런 행동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는다. 아직 성장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용납하기 때문이다.

‘막무가내’식의 의사표현은 반드시 함께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인내를 요구한다.

‘미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판단의 기준과 가치를 흐리게 하는 ‘영적’인 영향력이다. 이 영향력은 사람을 우매하게 하고, 게으르게 하고, 무기력하게 한다.

사람이 ‘미혹’의 영향력에 노출되어 버리면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正義)로운’ 사회에서 ‘막무가내’는 분열을 야기한다. 애써 지켜오던 ‘약속’을 의심하게 하고, 철저하게 보호해 오던 불가침의 영역을 허물어버린다.

한번 무너진 둑을 다시 세우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더 무자비한 희생이 요구된다. 처음 약속 때보다 몇 갑절의 시간과 합의가 필요하다.

‘정의로운’ 약속에 ‘막무가내’식의 주장이 있을 때, 사람들은 ‘미혹’되게 된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맞다 이쯤 되면 막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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