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아멘교회 송영춘 목사의 목회 수상(隨想) (10)

 

우리 말 중에 기독교적 정서가 묻어있는 단어가 있다면 으뜸이 ‘수치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후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한다.

자신들이 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수치심’을 느낀 나머지 잎으로 치마를 삼아 몸을 가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왜 벗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자신들이 죄가 없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얼마나 당당하고 꺼릴 것이 없었으면 자신들이 벗었다는 사실도 망각할 정도였을까?

그러나 죄를 짓게 되자 당당함이 사라져버렸다. 당당함이 사라지자 ‘수치심’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수치심’에 궁여지책으로 자신들의 몸이라도 가리고 싶었던 것이다.

‘수치심’은 자기방어의 수단이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감추기 위한 ‘자기 방어’의 수단이다. 자기 방어 차원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반응이고 현상이다.

‘수치심’은 그나마 양심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치심’과 동의어는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반의어는 ‘뻔뻔함’이다.

하나님 앞에 죄지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이 ‘수치심’을 아는 모습이다.

‘수치심’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양심의 가책의 결과에 대해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수치심’을 느끼고 잎으로 몸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찾으시자 “두려워하여” 아예 숨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온 세상이 붉게 물든다.

가을은 ‘수치’를 아는 계절인 것 같다. ‘부끄러움’을 아는 계절인 것 같다.

가을이 ‘수치심’을 느끼니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 하니 온 세상을 울긋불긋 물들이는 것 같다.

죄는, 과오는 우리가 저질렀는데 가을이 먼저 얼굴을 붉히는 것이다.

나라만 가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도 가을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민족에게도 가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우리 모두 ‘수치심’을 알고 ‘부끄러움’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뉴스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