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공동심포지엄 열려

▲ 31일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의 ‘늦봄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공동심포지엄’ 모습

6월 1일은 시인이자 신학자, 민주와 통일 운동에 헌신한 늦봄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이다. 문익환 목사가 꾸었던 민주의 꿈, 통일의 꿈이 광화문 촛불과 판문점의 평화 선언이 됐고, 한반도에 훈풍이 불고 있다.

늦봄 문익환 목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31일 오후 6시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선 ‘늦봄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공동심포지엄’이 열렸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신대학교가 공동 주최한 심포지엄에서는 김창주 교수(한신대 구약학)가 ‘늦봄 문익환 목사의 신학적 텍스트와 콘테스트’, 최형묵 박사(천안살림교회 목사, 기독교윤리학)가 ‘꿈을 현실로 산 신앙의 선구 문익환 목사’, 이남주 교수(성공회대 중국학과)가 ‘문익환 통일사상의 주요 쟁점과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각 발표에 대한 논찬은 민영진 교수(전 대한성서공회 총무)와 이유나 박사(성균관대 초빙교수), 이태호 선생(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이 맡았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김창주 교수는 신학자로서 늦봄의 사상적 면모를 조명했다.

김 교수는 늦봄의 생애를 관통하는 신학적 개념을 ‘일상어 신학’과 ‘빈자를 위한 신학에서 빈자가 된 신학여정’ 2가지로 정의했다. 그러면서 늦봄의 일상어 신학은 누구나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입말(입으로 주고받는 말)이며, 그의 신학 여정은 타자를 위한 삶과 공부였으나 결국 그 자신이 ‘땅 끝 사람’이 되는 삶이자 예언자적 실천이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늦봄의 입말에 대해 ‘단순’하다고 평하고, “그가 입말로 전한 강연은 사건이 되어 심금을 울리고, 그의 시집과 글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편한 일상의 언어로 기록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다”며, “늦봄은 삶의 자리와 시위 현장에서 듣고 쓰는 일상어를 생생하게 길러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의 뛰어난 입말은 1987년 7월 9일 이한열의 영결식에서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며, “늦봄이 열사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외칠 때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전율에 온몸을 떨게 했으며, 조국의 제단에 헌화한 열사들의 이름을 그가 부르짖을 때 세상을 뒤 엎는 폭발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늦봄의 예언자적 면모도 들여다보길 바랐다.

김 교수는 늦봄의 초기 논문들 중 유난히 예레미야와 관련된 글이 많음을 직시하고, 늦봄의 사상과 일생이 예레미야와 수없이 겹친다고 봤다. 그러면서 늦봄을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려도 좋겠다고 제시했다.

또한 “문익환의 시적 상상력은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 도전할 수 있는 저항의 마지막 수단”이라며, “그가 삶의 후반부를 예언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는 그가 마음껏 상상하고 힘껏 부를 수 있는 자유의 혼”이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늦봄의 텍스트는 좁게 보면 구약성서이고, 넓게는 기독교와 신학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김 교수는 “교류하던 지인들의 절망과 좌절의 경험은 현실을 아프게 통감하는 자극이 된 것”이라며, “늦봄은 당시까지 금과옥조로 여겨오던 활자화된 텍스트가 현실에서 부서진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활자 속의 텍스트를 역동적인 콘텍스트에 부딪혀 둘 사이의 큰 불일치를 확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 교수는 “그의 만년은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상호작용하고 마침내 둘은 구분되지 않는다”고 전제한 뒤 “첫째가 글말과 입말의 구분이 없는 일상어이고, 둘째는 (예언자의) 꿈과 현실이 하나가 되며, 그럼으로써 셋째는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경계가 없는 불이의 시간과 공간의 삶을 누리게 된다”며, “그이 시 제목처럼 철조망으로 갈린 남과 북의 ‘두 하늘’이 높은 하늘에서 보니 조국 한반도의 ‘한 하늘’이듯”이라고 피력했다.

이밖에도 김 교수는 늦봄 아호와 관련해서 “문익환은 ‘늦은 봄’을 자처하며 ‘늦봄’이라는 아호를 쓰기 시작했다”며, “1975년 절친 장준하를 의문의 죽음 가운데 보내고 그의 영정을 안고 며칠을 지냈다. 늦봄은 그때까지 신학자요, 성서번역가로 살아왔으나, 장준하의 못 다한 삶을 살겠다며 그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한다. 문익환은 자신이 늦게야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자각에서 아호를 ‘늦봄’으로 부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 교수는 “늦봄은 뛰어난 작명”이라며, “그의 육체적 존재가 부모에게서 소여된 것이라면 이제 그가 거듭나서 새로이 출발하는 시점을 자신에게 두려는 자각, 곧 늦은 깨달음에 대한 결기가 느껴지는 소신과 결심”이었다고 평했다.

끝으로 김 교수는 “그의 삶은 북간도의 척박한 땅에 뿌리내렸던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슬하에서 비롯됐다”며, “근대라는 솔깃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암울하던 일제강점기 1918년 명동촌의 ‘늦은 봄’에 태어나 히브리어와 한국어 사이,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 그리고 남녘과 북녘 사이를 잇는 ‘관계어’ 문익환으로 자란다”고 마쳤다.

두 번째 발표에 나선 최형묵 목사는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 늦봄의 내면세계와 실천적인 삶을 다뤘다.

최 목사는 문익환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서 역사적 과제를 매우 뚜렷이 인식하고, 역사를 설명하는 법칙을 규명하려는 관심이 아니라 역사의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풀고 바로 살아가려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자각이 그의 실천적 삶의 바탕이었음을 밝혔다.

또한 최 목사는 한국 현대사의 격랑가운데서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와 민주주의를 위해, 민족의 통일을 위해 그가 내디뎠던 힘찬 꿈의 발걸음은 그 자각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무장무애의 삶, 한 인간으로서, 다정스럽고 뜨거운 마음을 지닌 목회자로서, 예언자로서 소명감에 불타는 신학자이자 실천가로서 그의 삶은 실로 풍요로웠다고 고백했다.

최 목사는 또 “문 목사는 재삼 강조할 것 없이 자신의 삶으로 그 에큐메니칼한 지평을 열어갔다”면서, “온 몸으로 민중운동에 헌신한 것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말년에 감옥에 갇혀 있는 가운데에서도 기세춘 선생과 묵자를 둘러싼 대화를 신명나게 나눈 것도 우연의 소산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발표에 나선 이남주 목사는 대전환의 문턱에 서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문익환 목사의 통일사상을 소환해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 목사는 한반도 상황이 긍정적으로 전환되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세력의 결단이나 운에 운명을 맡겨서는 안되고,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역량을 키워나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문익환의 통일사상은 사회개혁을 위한 노력의 연장선 위에서 형성됐다”며, “당위적이거나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차원에서의 통일이 아니라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한 귀결점으로 통일을 모색했다”고 설명했다.

또 “문익환은 정부 주도의 통일논의로부터 독립된 통일사상을 발전시켰다”며, “그는 남한 내의 사회운동과 병행하며 발전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독립성과 두터운 깊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민주도의 통일이라는 발상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밀어붙였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문익환 통일사상이 구체적 성과를 남겼음을 밝혔다.

이 목사는 1989년 방북 과정에서 발표된 ‘4.2공동성명’이 그것이라며, ‘4.2공동성명’은 남과 북이 상대를 불신하고 자신의 이익만 고려하는 태도를 고집하지 않고, 전체 민족과 민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통일방안을 논의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했다.

[본지 제휴 <기독교한국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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