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삼환-김하나 부자 목사의 명성교회 세습을 보면서

요즘 “성경에는 ‘세습’ ‘대물림’이란 말도 없으며, 단지 ‘계승’이란 말이 있을 뿐이니 세습이라고 하지 말고 계승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 많고 거기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세습 옹호자들은 물론, 모모 교단에서까지도 '계승'이라 하고 '세습'이나 '대물림'이라고 하지 말라는 성명서까지 낸 것을 보고 아연실색할 정도다.

이런 황당한 주장에 영향 받는 분들이 의외로 많음을 보고, 한국교회의 지적, 윤리적 수준을 알 수 있게 되어 서글픔을 금할 길이 없다.

그들은 “성경에서는 ‘대물림’이란 말도, ‘세습’이란 말도 없으며 단지 ‘계승’이란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비록 세습을 했어도 그것을 세습이라고 하지 말고 ‘계승’이라고 하라”는 것이다. 필자는 그들의 주장을 ‘계승논리’라고 칭하면서 비판하겠다.

성경에는 “계승”이라고 하였으니 ‘세습’이라고 하지 말라는 주장의 무지와 오류를 밝힌다. 세습옹호론자들의 ‘계승논리’에 두 가지 무지 내지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성경적 무지와 오류요, 둘째는 언어학적 무지와 오류이다.
 
첫째, 승계논리에는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오류가 있다.

성경(개역개정판)에 ‘계승’이란 단어가 비록 세 번 나오지만 원어(히브리어)는 그보다 훨씬 더 넓고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어 성경에 계승이라는 단어는 역대하 22:1, 시편 45:16-17, 예레미야서 16:19에 세 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세습옹호론자들이 제시하는 핵심 성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계승'이라고 옮겨진 낱말은 히브리어로 '타하트'(תַּ֣חַת)인데, 어디까지나 한국식 번역이며, 의미가 다양하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을 분석한 것도 아니고 번역된 한국어를 갖고 '계승논리'를 펴는 것은 학적이지도 않지만 적어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이 '타하트'는 제사장이나 왕위의 계승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타하트'는 제사장이나 왕위 같은 직책을 이어받는 것은 물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상과 삶까지 이어 받는 것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역대하 22:1과 시편 45:16-17에서는 왕위계승의 의미로, 예레미야 16:19에서는 정신 계승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상숭배와 같이 부정적이고 악한 사상이나 삶을 이어받는 것에도 사용되었다.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 날의 피난처시며 민족들이 땅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이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민수기 5장에서는 '타하트'가 '두고(대신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0절에 "그러나 네가 네 남편을 두고 탈선하여 몸을 더럽혀서 네 남편 아닌 사람과 동침하였으면"이라고 할 때, 남편을 '두고도 대신에' 다른 남자와 음행한 여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민수기 32:14을 보면 더 흥미롭다.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타하트)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라고 되어 있다. 만일 김삼환-김하나 목사가 성경의 '타하트'(계승)에 근거하여 세습하였고 그래서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면, 두 김 목사는 민수기 32:14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노를 살 수 밖에 없는 계승(세습)을 한 것이 될 것이다. 김삼환-김하나 목사의 세습도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살 일이기 때문이다.

이 '계승논리'는 어떻게든 세습을 옹호하려는 데 혈안이 된 자들이 억지로 만든 비상식적인 논리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옛말처럼 무식하여 용감하게 된 격이다.

이 계승논리로 하면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사용할 수 없어야 한다.

신학적 용어는 가능하면 성경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옳다. 그러나 항상 성경의 용어로만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교리라고 해도 성경에 사상은 있고 단어가 없을 때 거기에 적합한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옳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기독교의 핵심중 핵심인 삼위일체 교리이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다. 번역상으로도 없고, 원어로도 없다. '세습'은 성경에 없으니 쓸 수 없다는 '계승논리'로 하자면, '삼위일체'란 말도 성경에 없으니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그렇게 하면, 성경에는 '권사'라는 말도 없으니, 권사제도도 없애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은가?

구약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의 대물림과 세습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교단법을 무시하고 세습을 하고도, 세습이란 말이 듣기 싫어 구약의 '계승'이란 말을 겨우 찾아내어 소위 ‘계승논리’를 만들어낸 세습옹호론자들의 용기도 놀랍고, 그 무지도 놀랍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구약에서 왕이나 제사장의 대물림이나 세습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타하트를 가치가 있는 '대물림'이나 '세습'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계승이라고 한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도 아니고 왕은 더더욱 아니다. 아마 세습을 하는 목사들은 자신이 구약의 제사장이거나 왕쯤 되는 줄로 착각한 것 같다. 물론, 이는 만인제사장설에 어긋나는 무지한 사상임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공격할 근거를 제시할까 두렵지만, 보자기에다 밤송이를 싼다고 해서 그 밤 가시를 숨길 수 없다고 여겨, 그냥 사용하기로 한다. 옛날에는 "청장년 일천명만 모이면 사단장보다 낫다"는 말이 있었는데, 요즘은 "청장년 일천명만 모이면, 장관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10만 명(?) 모이는 대형교회 담임목사는 '왕중에 왕' 격이 분명하다. 그래서 구약의 왕처럼 계승을 하되, 그것도 세습 계승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물론 이것도 '왕십자가론'으로 해 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더욱이 ‘세습방지법’은 교리가 아닌 교회 규범에 대한 법이다.

교리 용어라도 성경에 없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세습금지법이나 세습방지법은 교리가 아니라 교회 규범에 대한 법이다. 그런데 교리도 아닌 교회 규범에 대한 법을 가지고, '계승논리'로 성경 운운하며 세습이란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우매한 주장은 없을 것이다. 세습옹호론자들은 할 수 있다면 국어사전에서 세습이란 말을 빼내고 싶은듯하다. 그러나 혹 국어사전에서 ‘세습’이란 단어를 빼내도 세상 사람들이 교회 세습을 악하게 보는 그 생각은 빼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계승논리’가 맞다면, 부 목사는 담임 목사로 바로 올라가지 못하게 한 예장통합 교단 헌법 정 제5장 목사 제27조도 비성경적이란 주장으로 폐기해야 할 것이다.

예장통합 교단 헌법 정치 제 5장 목사, 제27조 목사의 칭호, 3항에 보면,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목사다. 임기는 1년이며 연임할 수 있다. 단,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바로 승계할 수 없고 해교회 사임후 2년 이상 경과 후 해교회 위임(담임)목사로 시무할 수 있다."로 되어 있다. 부목사는 담임목사로 바로 올라갈 수 없게 한 법이 법이다.

이 법은 83회 총회(1998년)에 총회에서 결의된 법으로, 지난 20여년동안 아무 군소리 없이 시행돼온 예장통합 교단법이다. 무려 20여년간 아무도 이에 대해 항의하거나 비성경적이라고 하거나 인권침해라는 주장이 공적으로 거론된 일이 없다.

성경에서는 계승이라고 하였으니 계승이라고 해야 한다는 ‘계승논리’로 하면 적어도 위의 법을 만든 성경적 근거만은 선명하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 조항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위의 ‘계승’처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예장통합 교단의 법이다. 그것도 준수해야 할, 합법적인 법이다. 세습 옹호자들이 세습 하나를 옹호하기 위하여 위의 헌법 정 제 5장 목사, 제27조도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진실과 용기가 있는지 지켜볼 일이다.

전술한 '승계논리'가 맞다면, 예장통합 교단은 성경상 근거도 없는 비성경적 법을 만들어 시행하는 비성경적 교단이라는 말이 된다. 웃음이 나올 뿐이다. 성경을 이용하여 더러운 세습을 옹호하려는 더러운 꼼수 논리요, 비성경적 주장에 불과하다.

둘째, ‘계승논리’에는 언어학적 무지와 오류가 있다.

‘승계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대물림’이나 ‘세습’이 악하다는 전제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

승계논리를 역으로 뒤집으면, "대물림이나 세습은 악하다"는 전제가 된다. 세습을 하고 그것을 세습이라고 하든 계승이라고 하든, 그것이 악이 아니라 선이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세습을 하고도 '세습'이나 '대물림'이란 말이 갖는 일반적인 부정의식을 피해보려는 꼼수로부터 나온 논리가 바로 '계승논리'이다.

세습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일이라면, '세습'이라고 하든, '계승'이라고 하든 무슨 문제가 될까라는 생각이 든다. 세습이라고 하면 악이 되고, 계승이라고 하면 선이 된다는 말인가?

‘계승’은 중립적인 용어라면 세습은 어느 정도 악하다는 가치가 부여된 말이다. 기업의 경우 낼 세금을 다 내고 정당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물려주었을 때도 그것이 대물림이요, 세습이지만 그것은 비난 받을 대물림이거나 세습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교회가 담임 목사를 대물림하였다. 세습을 하였다’고 할 때 그것 자체가 불의한 일을 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세습을 한 사람조차 세습이란 말을 듣기 싫어하고 계승이라고 하라는 것이 분명하다.

세습은 북한에서나 있는 것이니 세습이라고 하지 말라고 한다. 세습옹호자인 명성교회 김재훈 장로는 '세습'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다고 했다. 성경에도 없는 용어이고, 북한에서나 쓰는 말이라 거부감이 드는데, 왜 이런 말을 쓰냐는 것이다.

맞다. 필자는 "세습은 북한에나 있는 것이요 북한의 김 씨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거룩한 교회가 세습을 하여 거룩한 교회를 북한의 김 씨 왕국처럼 만드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계승’과 ‘세습’은 논리적으로 대칭된 논리가 아니다. 계승이란 말은 세습이란 말보다 더 넓은 개념이고, 세습은 계승이란 말보다 더 좁은 개념이다.

우리는 대물림하는 계승, 세습하는 계승을 일컬어 통칭 '대물림' 또는 '세습'이라고 일컫는다. 언어학적으로 따지자면, '계승'이란 단어와 '세습'(대물림)이란 말은 그 의미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 계승은 세습이나 대물림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계승을 하되, 대물림 계승이냐 아니냐, 세습 계승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필자도 은퇴한 후, 37년간 목회하던 ‘빛과소금교회’를 누군가에게 계승할 것이며, 계승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공적 선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교단에 세습금지법이 있든 없든, '세습 계승'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3년 예장통합 교단이 통과시킨 소위 세습금지법도 목회자 자녀에게 직접 계승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습을 세습이라고 하지 말고 계승이라고 하라는 말로 하면, 예장통합 교단이 2013년에 만든 '세습금지법'도 '계승금지법'으로 해야 한다는, 우스꽝스런 논리가 되고 만다. 언어학적으로 말하자면, '계승'이라는 단어는 '대물림' 또는 '세습'이라는 단어보다 더 넓은 유개념(類槪念 generic concept)이며, '대물림'이나 '세습'은 '계승'이라는 단어보다 더 좁은 의미의 종개념(種槪念 generic concept)이다.

사자는 '짐승'이란 개념보다 좁은 개념이며, 짐승은 사자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이듯, 계승은 세습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그런데 ‘세습이라고 하지 말고 계승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자를 사자라고 하지 말고 짐승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처럼 우스운 논리이다. 그런데도 '계승논리'를 펴는 학자들을 보면, 과연 학자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간다.

예장통합 교단은 바로 이 세습을 법으로 금지한 것이다. 그런데 그 법을 어기고 김삼환-김하나 목사가 세습을 한 것이다. 교단법도 지키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세습방지법이 없을 때도 "세습을 하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말하고 이제 세습방지법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조차 어기고 세습을 단행하는 것을 보실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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