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회언론회의 ‘종교탄압’ 논평에 대한 반박


한국교회 어디를 봐도 성한 곳이 없다. 연합단체 봐도 그렇고, 교단을 봐도 그렇고, 교회를 봐도 그렇다. 누구도 한국개신교를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교회가 평화를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고 있는 곳인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는 의문을 갖는다. 한마디로 참담하다.

가장 정직하고, 바른말을 해야 할 한국교회 언론회는 고등법원이, 강남 소재 사랑의교회에 대해서 내린 ‘도로(지하) 점용 취소 판결’에 대해서 종교탄압이라고 논평을 냈다.

이 논평에 대해서 한국개신교 교인 중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거의 없다. 사랑의교회는 건축당시부터 한국교회 바벨의 상징으로 대표되어 왔다. 사랑의교회가 위치한 법원 네거리를 지나는 모든 이들은, 웅장하게 서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부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교회가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한 것이다. 교회의 이 같은 입장발표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언론회는 “만약 법원의 판결대로 하여, 이미 교회 건물이 적법 하에 완성되어 이미 수년 째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철거나 원상복구를 명령한다면, 이는 명백한 ‘종교 탄압’이 되는 것이다”는 논평을 냈다.

한마디로 사랑의 교회는 정당한 건축 허가 절차를 거쳐 건축해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데, 고등법원의 판결은 개신교를 핍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서울시민이 모두가 사용하는 도로(지하)점용은 분명 잘못된 것인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시민이 ‘도로점용’에 대해서 반대하는데 왜 한국교회언론회만 종교탄압으로 규정하는 것인가.

교인들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교회언론회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계통의 종교자유정책연구원과 구 통진당 소속의 구의원이 문제를 제기해서 그런가. 그렇다면 그야말로 유치찬란이 아닐 수 없다.

법을 외치는 한국교회가 왜 법원의 판결을 종교탄압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한국교회언론회의 이 같은 주장에 국민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서초동 법원 네거리를 지날 때마다 이 교회를 향해 “아름답다”고 말하기보다, 성서의 ‘바벨탑’으로 연상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지 않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자본주의 경제가 교회 안에 자리 잡은 결과다.

그렇다 보니 한국교회는 전능하신 ’신‘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켰다.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 달러이며, 그의 성찬식은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세계 모든 민족이 좋아하는 자본주의 보편문명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국민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종교집단으로 변질됐다.

고등법원의 사랑의 교회에 대한 판결은 결코 사랑의 교회를 향한 판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마저 빼앗아 버린 한국교회를 향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한국교회의 면면을 살펴보라. 엄청난 돈을 쓴 교단장이 감독회장 선거 무효판결을 받았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제24대 대표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몸살을 앓고 있다.

중대형교회들은 교단과 교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바쁘다. 여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목사와 교인들은 적그리스도로 규정한다. 그리고 평화를 노래하며, 한국교회의 도덕성 회복을 말하는 교인들을 향해 “교회를 망치는 사람”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며, ‘팍스’(평화)를 찬양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지 않다. 독일의 신학자 하비 콕스는 “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교회를 버린다”고 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 교회를 세우자.

[본지 제휴 <기독교한국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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