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들었다는 음성,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명하는 것은 합당치 않아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설명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단체에 전임강사로 위탁하여 사역을 시작한 첫해에 개인적으로 잘 아는 목사님이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내게 제안하셨다. ‘다 좋은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어떨까?’ 이것이 당시 우리나라 교회의 영적 상태였다. 감사하게도 지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당연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한다.”(63페이지).

저자의 말처럼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당연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할까? 저자의 현실인식과 달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과 주장에 대해 한국교회는 여전히, 아직도 매우 비판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 때문에 한국교회는 질서와 평안보다는 혼란과 고통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님 음성을 듣는 신도들이 많아져서 교회가 평안해지고 은혜와 덕이 충만해졌다는 교회가 있으면 소개를 받았으면 좋겠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표현은 오해를 살 수 있다(내 삶을 변화시킨 성령, 그 위대한 힘, 53페이지)
성령 사역을 하고 있는 배본철 교수(성결대)조차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님은 나의 환경을 통해서, 어떤 사건을 통해서, 우연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성경말씀을 읽는 중에,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또는 열심히 일하는 중에, 심지어 휴식이나 잠자는 중에도 끊임없이 인도하심을 주신다. 이렇게 마음속에서 주님의 뜻을 깨달을 경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표현대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오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17세기 청교도들의 교훈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청교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은, 프라토적 신비주의라든가, 중세 신비주의 또는 ‘내적 빛’에 호소한 퀘이커파나 도덕률 폐기론 노선의 앤 허친슨과 같은 영적 신비주의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수단으로 신자들의 주관적인 영적 체험보다는 객관적인 계시로서 성경에 중점을 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영적 기준이 없는 주관적 신비주의의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처럼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계시 그 자체였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요즘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교계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과 집단들을 흔히 볼 수 있다.”(<내 삶을 변화시킨 성령, 그 위대한 힘>(배본철, 넥서스 크로스, 2014년 4월). 53~55페이지, 요약).

하나님의 음성 듣기라는 표현은 오해가 생길 수 있으며 그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과 집단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는 게 배 교수의 평가다.

저자의 글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며 꿈·환상 등을 봤다는 얘기들이 다수 등장한다.

“어느날, 내가 자고 있는데 누군가 ‘미진아!’하고 불렀다.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기에 무시하고 잤다. 그런데 또 ‘미진아’하고 불렀다.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다음 날도 자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본 세 사람이었다. 그들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 이틀 연속으로 꾼 꿈의 뜻을 나중에 주께서 알게 해 주셨다.”(74, 75, 76페이지 요약).

저자는 환상도 본다. 기도 중에 두 개의 나무토막에 ‘북한’, ‘남한’이라고 적혀 있는 게 보이더니 하나로 합쳐지면서 ‘통일한국’이란 글씨가 보였다고 한다. 주께서 통일이 된다고 말씀하셨고, 바로 이어서 황금으로 된 큰 산을 보여주셨다고 한다. 왕의 기업들을 통해 교회들에 큰 재물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받은 말씀이 있다고 한다.

“너는 한국교회와 디아스포라 교회들을 다니면서 왕의 재정 원칙을 가르치라. 개인과 가정과 기업과 교회의 주인을 맘몬(‘재물’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대립되는 우상을 일컬음)에서 하나님으로 바꾸라. 너는 내 교회에게 먼저 빚을 갚으라고 외쳐라.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177페이지).

1982년 말에 하나님께서 저자에게 홍콩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206페이지). 아시아 지도자들을 위한 선교훈련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려면 여권도 나와야 하고 비자도 나와야 하고 비행기표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여권 발급 받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고 한다. 아이와 함께 신청하려 했는데 여권 발급대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시 신청하라는 음성을 듣고 다시 신청했더니 놀랍게도 자신은 통과됐으나 아이가 걸렸다.

여권 담당자가 불가 판정을 한 것이다. 이 때 저자는 출 8장~10장을 예로 들며 “모세가 ‘내 백성을 보내라’는 주의 말씀을 바로에게 전달했을 때, 그는 즉시 거절했다. 하나님의 이적 베푸심의 강도가 높아질 때마다 바로는 타협했다.”며 출애굽기 말씀을 기록해 놓았다.

도대체 저자가 홍콩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은 것과 출애굽기 말씀, 양자 간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대한민국이 애굽이고, 홍콩은 가나안 땅이라도 된단 말인가? 엉뚱하기만 하다. 계속 여권 담당자가 여권 발급을 거절하자 저자는 출애굽기 말씀을 근거로 모세처럼 담대히 말했다고 한다. “아니요! 하나님께서 아이까지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담당자가 어이없어하고 화를 내며 거절했지만 저자는 “그러나 나는 주의 말씀에 순종했다.”며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태도다.

담당자의 거절에도 불구 저자는 나중에 이사야서 42장 13절까지 근거로 들며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치시리로다.” 도대체 출애굽과 여권 발급이 무슨 관계이며 이사야서에 나온 메시아 예언 중에 ‘대적을 치시리로다’는 말씀은 여권발급자와 또 무슨 관계란 말인가? 졸지에 규정과 원칙을 준수하려한 여권발급자는 여호와의 ‘대적’이 돼 버린 셈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대형 승용차를 선물로 받았다고도 한다(195페이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계속 떠오르는 생각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면 우리는 놀라운 결과들을 볼 수 있다. (5백만원을 선교헌금으로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이후에 주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중고차 대신 대형 승용차를 선물로 주셨다. 나는 재물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왕의 재정>, 106쪽 참조). 저자의 체험은 성경이 추구하는 정신과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맘몬이 우리의 주인이 돼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결국 추구하는 건 맘몬 아닌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함한 사람에게 '에스더서의 하만 사건'을 보게 될 거라고 하셨다고 주장하는 저자(264페이지)

나무에 달린 하만(에스더서에 나오는 사람으로서 에스더를 비롯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다 오히려 사형당한 인물)의 예를 들며 자신이 관계한 단체에 대해 모함하는 한 사람에 대해 비판하는 글도 나온다. 일을 하다보면 반대에 부딪히고 모함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법 아닌가? 나를 모함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을 성경에 나오는 하만에 빗대는 것, 그것도 사적인 감정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저술한 책에 기록하는 건 과장이요 오만함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에게 보냈다고 한다.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이 일은 당신에게 유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로 나는 너무나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대처하기 위해 금식하고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모르드개의 장대에 하만이 달릴 것을 보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주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당신에게 전함으로 당신이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랍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일의 중심에 섰던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264페이지).

상대를 성경에 나오는 하만과 동일시하며 그에게 메시지까지 보내고, 그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고 한다. 표현이 순화돼 있지만 자신이 들었다는 음성으로 상대를 협박하고 저주할 수도 있는 경계선에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을 분별하는 방법을 정리해 놓은 바 있다(277페이지). 내가 들은 음성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일치하는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가’,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인가’,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인가’를 따져보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하나님의 음성인지, 사탄의 속삭임인지 분별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기준을 저자가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과 관련해서 들었다는 음성에 대입해 보았으면 좋겠다. 양자는 별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나를 모함하는 사람에 대해 장대에 달린 하만의 사건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응답으로 받았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우리는 왕의 음성 비판적 읽기(1)편에서 계시적 사건과 개인의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그대로 응답 받았다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만 사건 또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계시적 사건 중의 하나이지 한 개인을 모함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하만처럼 장대에 매달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말씀은 아니다. 만일 그런 음성을 들었다면 저자 자신이 제시한 기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유익과 대입해 볼 때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기준을 287페이지에 한번 더 제시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나는 사탄의 음성을 식별했다. 연합을 깨뜨리는 것, 권위에 대적하게 하는 건 하나님의 음성과 기록된 말씀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한번도 업그레이드 된 적이 없다.”(287페이지).

사탄의 음성을 식별하는 저자의 방법은 별로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만일 어떤 공동체가 비진리로 연합된 것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연합을 위해 만들어진 권위라면 저항하는 게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탄의 음성을 식별하는 방법으로서 저자는 그 두가지 예를 들었다. 여러모로 저자의 ‘왕의 음성’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회를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저자(왕의 음성 41페이지).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박영돈, IVP, 2011)에 나오는 말을 저자는 물론 독자들이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길지만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인용해 본다.

“최근 들어서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예언훈련학교에서 선무당 같은 어설픈 예언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 또는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엄청난 혼란이 야기된다. 자기 머리 속에서 떠오른 생각이 주님의 말씀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마귀적 음성까지 주님의 말씀으로 위장되기 일쑤다. 순진한 교인들은 그들이 직통으로 계시된 말씀을 전파하는 것 같아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에 더 솔깃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의 진리에 의해 전혀 입증될 수 없는 온갖 허튼 소리들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범람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한다는 점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칭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인들이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에 더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니 성경보다 그들의 에언이 훨씬 더 실질적인 권위가 있는 셈이다”(31~32페이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마음에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성령 뿐 아니라 육신의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곳이기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된다.”(33페이지).

▲ 예언은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성 안고 있다고 주장하는 박영돈 교수(<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37페이지)
    
“이런 식으로 사이비 예언이 범람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는 머지 않아 무당종교로 변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자기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나 마음속에 일어난 감동을 말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그 누구도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과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35페이지).

“확실한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이와 유사한 예언을 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예언적인 의견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명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자신의 예언적인 통찰을 꼭 말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이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나 인상을 떠오르게 하시는 것 같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솔직하고 진솔한 태도이며 많은 혼란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이다”(36~37 페이지).

“사람은 자신이 가장 의존하는 것에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더 의존하게 되면 예언자의 오류와 부패를 통해 역사하는 거짓의 영이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언은 교회를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역사하는 영역이며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37페이지).

박영돈 교수의 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예언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다 △교인들이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에 더 의존하게 만든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사이비 예언이 범람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는 머지 않아 무당종교로 변할 것이기에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예언은 교회를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역사하는 영역이며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본지 제휴 <기독교포털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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