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계 12월호] 방송계의 전설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

1981년부터 11년간 ‘KBS 9시 뉴스’ 앵커였고 여성 아나운서 최초로 9시 뉴스를 단독 진행해 ‘방송계의 전설’로 불리는 신은경 아나운서. 지난 3월부터 청소년들의 건강한 성장과 역량개발을 지원하는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으로 섬기고 있는 그를 <신앙계 12월호> ‘커버스토리’가 만났다.


신은경 아나운서(58)는 2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유교 집안으로 1년이면 제사만 12번씩 지내야 하는 종갓집이었는데 중학교 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 넷을 모두 교회로 보냈다.

“어머니는 일도 해야겠고 아이들도 잘 키워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셨나 봐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교회에 보내자’였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듣고 바르게 크라는 뜻이었겠지요. 중학교 때는 열심히 교회에 나갔는데 공부가 우선시 되면서 발길을 끊게 됐습니다.”

그는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가 되었다. 5월에 합격해 3개월 연수를 받고 가을개편 첫날, 뜻밖에 저녁 9시 뉴스 앵커자리에 앉게 됐다.

그로부터 11년간 처음에는 주중 공동 앵커로, 나중 5년간은 주말 단독 앵커를 맡아 전 세계 뉴스를 안방에 전달했다. 당시 여자 아나운서 최초로 9시 뉴스를 단독 진행한 것이 화제가 됐었다.

1992년 아나운서 직을 내려놓고 저널리즘을 공부하러 영국 유학 후 돌아와 박성범 앵커와 결혼하면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제 결혼의 큰 의미이기도 한데 남편이 평안북도 선천출신의 모태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니 친정어머니가 십자가 목걸이까지 사주시면서 ‘여자는 시집가면 그 집안의 가풍을 따라야 한다’며 남편 따라 교회에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아무런 장벽 없이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정치하는 남편을 둔 덕분에 4년에 한 번씩 어김없이 고난이 찾아왔다. 남편을 따라 안 가본 곳이 없고 안 해본 일이 없다. 총 네 번의 선거를 치렀다. 늘 어려웠던 선거였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신앙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네 번째 선거가 찾아왔다. 당에서는 전략공천을 이유로 현역의원이었던 신이사장의 남편을 공천에서 배제시켰고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신 이사장이 다른 당의 공천을 받아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간의 광야 같은 삶이 시작됐다.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한 것 같았고 사람들 보는 것 자체가 두려웠던 시간이다.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많이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그 때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쪽 문이 열린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문이 열렸을 때 아쉬워할 것이 있다면 지금 상황은 그 아쉬워할 것을 얻은 셈이잖아요.”

2010년 가을, 그렇게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에 들어섰다. 이후 놀라운 일들이 이어졌다.

간증 프로그램에 나가게 됐고 CTS에 고정 프로그램 진행도 맡게 되었다.

북한 주민들을 위한 <조선어 성경> 낭독도 하게 됐고, <홀리 스피치>(포이에마) 책도 출간했다.

대학 강의는 물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하기를 나누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건강한 활동과 행복지수를 높이는데 힘쓰는 책임을 맡고 있다.

다음은 스피치(말하기) 전문가인 그가 말하는 ‘말하기의 중요성’이다. 

“혀는 마치 배의 작은 키와 같고(약 3:4) 작은 불씨 같다고(약 3:5) 하지요. 또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다고 잠언서는 이야기하고 있지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꺼낼 수밖에 없어요. 말은 내가 먼저 듣고 따라서 내가 먼저 영행을 받기 때문에 말은 태도, 정신, 마음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버튼입니다.”

[신은경 아나운서 인터뷰 전문은 <신앙계 12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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