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예수 왕의 복음> (Scot McKnight 저, 박세혁 역, 새물결플러스)

(복음주의가 아닌 구원주의에 매몰된 한국교회의 실상 이해를 위해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이진섭 교수의 서평을 싣습니다. 전문이 긴 관계로 축약해서 실으며, 전문은 하단 박스에 별도로 싣습니다. 편집자 주)

들어가는 말

▲ 이진섭 교수

미국 노던 신학교(Northern Seminary) 스콧 맥나이트(Scot McKnight) 교수가 쓴 도발적인(?) 책, The King Jesus Gospel: The Original Good News Revisited(Zondervan, 2011)가 2014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맥나이트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지적한다. 현대 미국 복음주의가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붙들기보다는 ‘구원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스스로를 ‘복음주의’라 쓰지만 ‘구원주의’로 읽거나, ‘복음주의’라 읽지만 ‘구원주의’로 이해한다는 주장이다.

책을 찬찬히 읽어 가면 왜 이 책이 미국 복음주의 교회뿐 아니라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책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1. 책의 특징: 하단 '서평 전문(全文)‘ 참조

2. 저자의 주장: 본론 10개의 장(章)에 대한 주장 요약 - 하단 '서평 전문(全文)‘ 참조

맥나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도입 글과 본론 10개의 장을 통해서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 요점은 현대 미국 복음주의가 중요한 면에서 잘못 가고 있으며 새롭게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그는 책의 도입 자리에서 자신이 1971년 고등학교 3학년 때 겪었던 전도 경험을 냉소적으로 소개한다. 결단 촉구에 급급한 쉽고 빠른 전도 방식이 사람들을 교회에 참석하도록 만들 수는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신자, 즉 제자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경험은 그가 신학을 공부할 때뿐 아니라 학자가 되어 연구하는 내내 의문을 품게 만들었고, 이 책을 쓰게 하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이 책은 오래전 시작된 그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3. 장점

책은 대체적으로 잘 쓰였다. 결의가 보이고 의미심장하다. 짧고 쉽지만 울림과 파급이 기대되는 저술이다. 학술적 가치보다는 현대 교회의 방향전환과 개혁에 도움이 된다. 다양한 면에서 그 유익을 말할 수 있지만, 특별히 다섯 가지 점에서 그 장점을 추릴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본서는 미국 복음주의가 구원주의에 빠져있음을 잘 지적한다. 현재 복음주의 교회가 신약성경이 제공하는 복음을 잘 이해하기보다 나 개인의 구원을 중심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음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현 시대 교회가 복음주의를 축소해서 구원주의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잘 평가하고 있다. 서평자가 평소 쓰던 용어로 말하자면 현대 교회는 복음주의를 ‘구원환원주의’로 (더 세밀하게는 ‘개인구원 환원주의’로, ‘칭의구원 환원주의’로) 이해하고 있음을 말한다.

둘째, 이 책은 이런 주장의 근거로 현대 성경학의 연구 결과를 나름대로 적절하게 사용한다. 특별히 본서는 신약학자들이 새롭게 찾아 밝히고 있는 ‘이야기’(narrative, story) 연구 결과를 필요한 자리에 적절히 반영하여 논제에 사용한다. 따라서 저자의 논제는 성경 본문과 성경학 연구에 기반을 둔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되고 있다. 책의 논제를 거부하는 게 그렇게 쉽지 않다.

셋째,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장점은 저자가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답게 초대교회 복음의 기원과 전승을 예리하게 논리적으로 파헤쳐가고 있는 모습이다. 맥나이트는 바울의 복음을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파헤치고, 그 복음이 곧 복음서에서 확대 설명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뿐 아니라, 그 복음의 내용이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런 복음 이해의 기원이 예수에게 있음도 나름대로 파헤치려고 했다. 이처럼 저자는 신약성경의 여러 부분을 살피며 여러 본문과 책들 사이의 역사적 상관성도 나름대로 풀어서 그려냈다.

넷째, 저자는 복음주의가 ‘구원의 문화’로 넘어간 것이 사실 종교개혁 때부터임을 대담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일이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그렇게 쉽지 않은 분위기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도발적인 저술 뒤에 있는 (교회 개혁에 대한) 그의 용기와 열정은 귀하게 보인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이런 주장을 철저하게 현실과 연계하여 펼치고 있음도 눈여겨 볼만하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신약학 연구를 감당하는 학자가 현실 교회의 문제와 교회 개혁의 구체적인 영역까지 넘나들며 답과 대안을 추구하는 모습은 귀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들의 복음전파와 현대의 복음전파를 비교하는 부분이나, 현대 교회가 결국 복음의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점까지 고민한 대목에서는 교회를 향한 그의 애정과 사랑을 잘 읽을 수 있다.

4. 약점: 하단 '서평 전문(全文)‘ 참조

전략(前略)

둘째, 이와 관련하여 맥나이트가 선택하여 집중하는 신약본문의 자리가 또한 큰 약점이 된다. 즉, 그의 논쟁의 자리에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빠져 있다는 점이 약점으로 남는다는 말이다. ‘구원주의’에 빠져 있다고 맥나이트가 비평한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그 ‘구원주의’의 터전으로 안주하고 있는 자리가 바로 바울서신이고, 그 중에서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다.

그런데 맥나이트는 그것을 반박하는 이 책에서 바울서신을 주로 다루기보다는 복음서에 집중하고 있고 부차적으로 사도행전을 다룬다. 바울서신은 고린도전서 15장에 국한하여 다룰 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상대편 진영의 논거 자리에 들어가 논쟁하여 승리를 얻어내기보다는 상대 진영 변방에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점을 나열하고 있는 셈이다.

맥나이트가 진정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보이려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로 들어가 설득했어야 한다. (서평자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로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맥나이트가 복음서를 많이 연구했던 학자인 점을 감안하면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약점임은 분명하다. (그는 NIV 적용주석 갈라디아서까지 집필하지 않았던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의 주장을 설득할 수 있어야 그의 논지는 제대로 성립한다.

중략(中略)

번역 책의 제목도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예수 왕의 복음’(밑줄은 필자 것)이란 제목은 이 책의 특징과 논지를 잘 드러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주요논지를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측면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다룬 게 아니라 (‘예수 왕의 복음’이란 번역은 이런 점을 말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가지며, ‘당신의 삶에 예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는 부제도 마찬가지다.) 복음주의가 구원주의로 대치된 점을 지적하고 진정한 예수 이야기의 복음주의로 돌아가는 길을 주장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 왕의 복음’이란 제목은 원제인 ‘The King Jesus Gospel’의 뉘앙스를 잘 살리는 것 같지도 않다.

좀 더 적절한 제목을 뽑으라면, ‘복음, 왕이신 예수’나 ‘왕이신 예수의 복음’이 나을 듯싶다. 그래야 책의 논지가 살아난다. (필자는 번역 제목을 보고 처음엔 책의 내용을 다르게 추측했다.) 또한 영문 부제인 ‘The Original Good News Revisited’를 그대로 번역하여 ‘원래 복음 다시 찾기’로 쓰는 게 (‘당신의 삶에 예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는 부제보다는) 이 책이 주는 파급력을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 듯싶다.


나가는 말

본서는 미국 복음주의의 구원주의 문제를 주로 비판한 책이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 복음주의 교회만의 문제일까?

한국 복음주의는 미국 복음주의와 직결되어 있고, 사실 미국보다도 더 깊이 구원주의에 빠져 있는 듯 보인다. 사실 이 구원주의의 문제는 현재 개신교 복음주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고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숙제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한국교회에, 더 나아가 개신교회 전체에 널리 읽힐 필요가 있다. 읽힐 뿐 아니라, 이 논지를 더 깊이 있게 논의하여 이 주제를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개신교 500년의 역사를 더욱 올바르게 세울 수 있는 길이 더 잘 보일 거다.

개신교 500주년을 코앞에 둔 지금, 개신교인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 하나 더 등장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반갑다.

개신교회가 ‘구원환원주의’ ‘칭의환원주의’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는 길이 제대로 열리길 소망한다. 복음을 복음의 자리에, 구원을 구원의 자리에, 칭의를 칭의의 자리에 제대로 놓아야 한다.


서평  「예수 왕의 복음」
Scot McKnight 저, 박세혁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298쪽, 14,000원
󰡔성경과 교회󰡕 14/1 (2016), pp 159-72
                    이진섭 / 신약학

들어가는 말

미국 노던 신학교(Northern Seminary) 스콧 맥나이트(Scot McKnight) 교수가 쓴 도발적인(?) 책, The King Jesus Gospel: The Original Good News Revisited(Zondervan, 2011)가 2014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맥나이트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지적한다. 현대 미국 복음주의가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붙들기보다는 ‘구원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스스로를 ‘복음주의’라 쓰지만 ‘구원주의’로 읽거나, ‘복음주의’라 읽지만 ‘구원주의’로 이해한다는 주장이다. 책을 찬찬히 읽어 가면 왜 이 책이 미국 복음주의 교회뿐 아니라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책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1. 책의 특징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책의 특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특징은 현재 미국 복음주의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신약학자가 복음주의 교회 모습을 날카롭게 비평하며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비평은 주변적인 몇 가지를 건들기보다 매우 크고 중요한 영역을 다룬다. 어쩌면 개신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할 수 있는 ‘복음’과 ‘구원’의 주제를 다룬다. 그러기에 이 책은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님에도(영어로 192페이지, 한글로는 298페이지 임에도) 생각의 무게가 무거운 책으로 평가될 수 있다.
둘째, 학자의 글임에도 매우 쉽고 평이하게 쓰였다는 점이다. 맥나이트는 학자의 전문성을 갖추면서도 그 전문적 연구 결과를 교회에 쉽게 전하는 데 관심을 많이 가진 학자이다. 이는 NIV 적용주석 몇 권이 이미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점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예수 왕의 복음」도 이런 그의 성향을 잘 반영한다. 이 책에서 맥나이트는 자신이 얼마나 교회 현실에 민감한지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학문적 연구 결과가 곧 교회와 목회 현실과 얼마나 깊은 연관이 있는지도 잘 보여준다. 이 책에는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예와 현실이 풍성히 들어 있을 뿐 아니라 현실의 실제적 고민 또한 잘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주장은 성도와 교회에 파급효과를 미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냥 간편하고 쉬운 생각과 논리를 가볍게 펼치는 저술은 아니다. 학문적 깊이를 어느 정도 담보한 책이고, 현대 신약학의 연구 결과를 여러모로 담고 있는 저술이다. 성경학의 여러 연구 결과를 새롭게 재편하여 교회 성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책이다. 밑바탕이 있는 연구에서 나온 저술이기에 교회 현실에 주는 함의도 적잖은 무게로 다가온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받아들일 무게는 그렇게 가볍지 않은 책이다.

2. 저자의 주장

맥나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도입 글과 본론 10개의 장을 통해서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 요점은 현대 미국 복음주의가 중요한 면에서 잘못 가고 있으며 새롭게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그는 책의 도입 자리에서 자신이 1971년 고등학교 3학년 때 겪었던 전도 경험을 냉소적으로 소개한다. 결단 촉구에 급급한 쉽고 빠른 전도 방식이 사람들을 교회에 참석하도록 만들 수는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신자, 즉 제자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경험은 그가 신학을 공부할 때뿐 아니라 학자가 되어 연구하는 내내 의문을 품게 만들었고, 이 책을 쓰게 하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이 책은 오래전 시작된 그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1장에서 맥나이트는 매우 도발적인 선언을 한다.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뭔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첫째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이 어떤 점에서 좋은 소식인지를 모르겠다는 어떤 사람의 이메일(e-mail) 질문이다. 이 사람에게 복음은 개인 구원에만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미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공유되어 있다. 둘째, 그는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가 누가복음 18장으로 설명한 내용을 증거로 제시한다. 파이퍼는 이 본문을 다루며 예수께서 이신칭의라는 바울의 복음을 선포했다고 결론 내린다. 파이퍼에게 이신칭의는 곧 복음이기에 그에게 이 결론은 복음적이다. 이것이 미국의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당연하지만, 이는 복음을 이신칭의 구원으로만 보는 협소한 시각이다. 셋째, 파이퍼와 정반대로 어떤 목회자는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셨다고 단정한다. 그의 눈에 복음서는 이신칭의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이 곧 이신칭의 구원이라고 단정하기에 가능한 논리다. 세 경우 모두 복음을 곧 칭의 구원이라고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맥나이트는 2장에서 보다 직설적으로 자신의 논제를 던진다. 현재 미국 복음주의는 복음적이라기보다 구원적이다. 교회는 ‘복음의 문화’를 만들기보다, ‘구원의 문화’를 만든다. 개인적 구원의 경험을 증언할 수 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어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를 만든다. 유아세례, 교리문답 같은 과정을 거치며 결단에 초점을 두지만 거기까지다. 결단한 사람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는 요구하지 않는다. 구원의 문화는 결국 신약성경이 말하는 제자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는 게 그가 관찰한 결과이자 주장이다.
1장이 의문 제기이고 2장이 논제 제시라면, 3장은 그런 논제의 근거 제시다. 3장에서 맥나이트는 자기주장의 근거를 간략하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복음을 이해하려면 네 개의 범주, 즉 1) 이스라엘/성경 이야기, 2) 예수 이야기, 3) 구원 계획, 4) 설득의 방법이 차례로 쌓아져 가는 방식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단순히 구원 계획과 설득의 방법에 치중한다. 이것을 강조하느라 앞의 두 가지를 잃어버린 역삼각형 꼴이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전하지도 못한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과 예수) 이야기로부터 구원을 말하는데, 현대 교회는 이 이야기를 생략한 채 구원을 말한다. 결국 현대 교회는 구원으로 복음을 색칠해 낼 뿐이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진짜 복음이 되기 어려운 이유이다.
저자는 이후 네 장(4, 6, 7, 8장)에 걸쳐 신약성경의 자료를 들추어가며 3장의 주장(논제의 근거)을 자세히 풀어 설명한다. 신약성경은 복음을 내 구원의 문제로 국한해서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예수 이야기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울의 복음(4장), 복음서 안의 복음(6장), 예수와 복음(7장), 베드로[사도들]의 복음(8장)을 단계적으로 살펴가며 결국 신약성경이 복음이라고 말하는 바가 (나 개인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성취한 예수의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4장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복음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바울은 복음에 관한 한 혁신자가 아니라 전승자인데, 그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葬事), 부활, 나타나심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모두 등장한다. 사영리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왕 되신 예수 이야기로 복음을 말한다. 이 예수 이야기를 구원 계획에서 떼어내면 문제가 생긴다. 이스라엘-예수 이야기를 떼어내고 구원 계획만 말하면, 구원 중심적 구원 문화가 지배하여 복음을 왜곡시킨다. 구원주의자들은 예수의 삶을 성금요일로 축소시키지만, 바울의 복음(곧 초대교회 전승)은 그보다 넓고 큰 예수 이야기를 한다.
6장에서 맥나이트는 복음서 전체가 사실 이 점을 잘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서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성취하신 예수 이야기, 즉 복음을 말한다. 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오심으로부터 그에 대한 소개를 시작하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클라이맥스를 둔다. (예컨대, 마가복음의 약 50%는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에 할애한다.) 이것 차체가 복음이고, 그래서 복음서다. 내가 예수를 믿어 의롭다 여겨져 구원받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복음서는 고린도전서 15:3-5의 확장판이자 주석서인 셈이다.
7장은 사도들 전승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파헤친다. 간략히 말해 그 기원은 예수에게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자신이 복음이라고 생각하셨다. 예수는 천국, 곧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스스로 그 나라의 핵심 인물임을 주장하셨다. 복음서의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사실은 자신이 곧 ‘이스라엘의 대통령’(p. 167)임을 명확하게 지명하신 셈이다. 복음서는 결국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복음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선포한 셈이다.
맥나이트는 사도들의 복음전파도 사실 마찬가지라는 점을 8장에서 설명한다. (저자는 이 장을 ‘베드로의 복음’이란 제목으로 베드로에게 국한하려 하지만 그가 선택한 본문들은 사실 베드로 한 사람 만이 아니라 사도들을 전체적으로 다룬다고 보는 게 맞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여러 개의 복음 설교(행 2:14-39; 3:12-26; 4:8-12; 10:34-43 & 11:4-18; 13:16-41; 14:15-17; 17:22-31)와 복음 요약(행 2:40-41; 5:42; 10:36; 10:42; 13:5; 13:7; 13:15; 13:26; 13:31; 14:7; 14:21; 16:10; 17:18; 28:31)을 살피면 이를 잘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본문의 내용은 모두 예수 이야기로 되어 있다. (내가 의롭다 여김을 받아 구원 얻는 것에 초점을 두어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 이야기가 복음이다. 결국 이것으로 신약성경의 복음에 대한 퍼즐은 맞추어진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예수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복음전도가 신약성경의 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9장은 이점을 간략하지만 집중적으로 다룬다. 맥나이트는 여섯 가지 면에서 신약성경의 복음전파와 우리 시대의 복음전도의 차이를 대비시킨다. 1) 복음전도가 성취하려는 것, 2) 복음전도를 규정하는 것, 3) ‘복음전도, 진노, 심판’, 4) ‘복음이 해소하는 문제’, 5) ‘복음과 제국’, 6) ‘예수에 관한 이야기’라는 여섯 가지의 영역에서 현대의 복음전도가 신약성경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 구원 문제가 예수 이야기를 압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구원이 복음(예수 이야기)을 압도하게 되었을까? 맥나이트는 그에 대한 답을 5장에서 제시한다. 그는 이런 현상이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는 종교개혁에서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루터보다 칼빈의 경우가 더 그렇다. 그 증거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고백 문서의 목차가 이전 신조들과 다르게 변동된 점을 지적한다. 신약성경과 초대교회 신조들은 (예컨대,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 등은) 예수 이야기에 초점을 두었지만, 개혁자들의 고백서에는 예수 이야기가 순서상 뒤로 조정된다. 니케아신조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방식이 재구성된다. 루터와 칼빈은 모두 ‘복음의 문화’와 ‘구원의 문화’를 함께 말하긴 하지만, 종교개혁은 결국 복음을 구원론으로 전환시킨다. 복음 이야기와 구원 이야기가 새로운 틀로 재구성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현대 영미 복음주의는 이 종교개혁의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어가고 있다. 구원의 문화가 지배하게 되었다.
맥나이트는 이 구원의 문화보다 복음의 문화가 더욱 부각되어야 한다고 항변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10장에서는, 복음의 문화를 만드는 길에 대해 말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을 네 가지 요점으로 축소시켜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을 탈피하고(아마도 저자는 4영리 같은 방식을 의도한 듯하다.) 성경이 제공하는 이스라엘-예수 이야기를 요약적이지만 풍성하게 전달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복음의 문화를 만드는 기본 방향과 방식을 다섯 가지로 제안한다. 1) 먼저 우리가 이야기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2) 예수 이야기에 더 많이 몰입해야 할 뿐 아니라, 3) 교회 이야기에도 주목해야 한다. 4) 더 나아가 세상의 잘못된 주장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5) 우리가 구원받고 변화될 수 있는 복음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는 예수 복음에 합당한 문화를 우리 시대에 맞게 개발해야 한다고 피력한다.

3. 장점

책은 대체적으로 잘 쓰였다. 결의가 보이고 의미심장하다. 짧고 쉽지만 울림과 파급이 기대되는 저술이다. 학술적 가치보다는 현대 교회의 방향전환과 개혁에 도움이 된다. 다양한 면에서 그 유익을 말할 수 있지만, 특별히 다섯 가지 점에서 그 장점을 추릴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본서는 미국 복음주의가 구원주의에 빠져있음을 잘 지적한다. 현재 복음주의 교회가 신약성경이 제공하는 복음을 잘 이해하기보다 나 개인의 구원을 중심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음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현 시대 교회가 복음주의를 축소해서 구원주의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잘 평가하고 있다. 서평자가 평소 쓰던 용어로 말하자면 현대 교회는 복음주의를 ‘구원환원주의’로 (더 세밀하게는 ‘개인구원 환원주의’로, ‘칭의구원 환원주의’로) 이해하고 있음을 말한다.
둘째, 이 책은 이런 주장의 근거로 현대 성경학의 연구 결과를 나름대로 적절하게 사용한다. 특별히 본서는 신약학자들이 새롭게 찾아 밝히고 있는 ‘이야기’(narrative, story) 연구 결과를 필요한 자리에 적절히 반영하여 논제에 사용한다. 따라서 저자의 논제는 성경 본문과 성경학 연구에 기반을 둔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되고 있다. 책의 논제를 거부하는 게 그렇게 쉽지 않다.
셋째,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장점은 저자가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답게 초대교회 복음의 기원과 전승을 예리하게 논리적으로 파헤쳐가고 있는 모습이다. 맥나이트는 바울의 복음을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파헤치고, 그 복음이 곧 복음서에서 확대 설명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뿐 아니라, 그 복음의 내용이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런 복음 이해의 기원이 예수에게 있음도 나름대로 파헤치려고 했다. 이처럼 저자는 신약성경의 여러 부분을 살피며 여러 본문과 책들 사이의 역사적 상관성도 나름대로 풀어서 그려냈다.
넷째, 저자는 복음주의가 ‘구원의 문화’로 넘어간 것이 사실 종교개혁 때부터임을 대담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일이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그렇게 쉽지 않은 분위기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도발적인 저술 뒤에 있는 (교회 개혁에 대한) 그의 용기와 열정은 귀하게 보인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이런 주장을 철저하게 현실과 연계하여 펼치고 있음도 눈여겨 볼만하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신약학 연구를 감당하는 학자가 현실 교회의 문제와 교회 개혁의 구체적인 영역까지 넘나들며 답과 대안을 추구하는 모습은 귀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들의 복음전파와 현대의 복음전파를 비교하는 부분이나, 현대 교회가 결국 복음의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점까지 고민한 대목에서는 교회를 향한 그의 애정과 사랑을 잘 읽을 수 있다.

4. 약점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면에서 본서에 아쉬움이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몇 가지가 고려되어 저자의 논지가 좀 더 분명해지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저자의 논지에 ‘복음’(‘토 유앙겔리온’, ‘to euvagge,lion’)이라는 용례분석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 크게 아쉽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규명하는 과정에 ‘토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가 어떤 용례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고대 근동의 다른 문서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70인역과 신약성경에서의 용례를 분석한 결과에 기초하여 논지를 펼쳤어야 했다. 고린도전서 15장이 결정적 자리라고 단정하고 시작하는 건 그다지 설득적이지 않다. 예컨대, 로마서 1:16에는 복음을 ‘구원’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나, 에베소서 1:13에서는 ‘구원의 복음’이란 요약이 등장한다는 점 등을 그냥 무시할 수 없다. 이 본문들이 왜 고린도전서 15장보다 등한시되어야 하는지를 복음의 전체 용례 속에서 살피지 않는 한 맥나이트의 논지가 온전히 서기는 어렵다. ‘복음’이란 단어의 신약성경 용례가 결국 ‘천국(하나님 나라) 복음’과 ‘그리스도(하나님 아들)의 복음’이란 두 가지 기둥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철저한 용례 분석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는 한 반론의 여지는 이곳저곳에서 나올 수 있다. 신약성경의 용례분석은 신약성경의 복음이 예수 이야기인 점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논거이다.
둘째, 이와 관련하여 맥나이트가 선택하여 집중하는 신약본문의 자리가 또한 큰 약점이 된다. 즉, 그의 논쟁의 자리에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빠져 있다는 점이 약점으로 남는다는 말이다. ‘구원주의’에 빠져 있다고 맥나이트가 비평한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그 ‘구원주의’의 터전으로 안주하고 있는 자리가 바로 바울서신이고, 그 중에서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다. 그런데 맥나이트는 그것을 반박하는 이 책에서 바울서신을 주로 다루기보다는 복음서에 집중하고 있고 부차적으로 사도행전을 다룬다. 바울서신은 고린도전서 15장에 국한하여 다룰 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상대편 진영의 논거 자리에 들어가 논쟁하여 승리를 얻어내기보다는 상대 진영 변방에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점을 나열하고 있는 셈이다. 맥나이트가 진정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보이려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로 들어가 설득했어야 한다. (서평자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로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편 홈그라운드에서 싸워 이겨야 진정한 승리가 되는 것과 유사하다. 맥나이트가 복음서를 많이 연구했던 학자인 점을 감안하면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약점임은 분명하다. (그는 NIV 적용주석 갈라디아서까지 집필하지 않았던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의 주장을 설득할 수 있어야 그의 논지는 제대로 성립한다.
셋째, 신약성경에 왜 ‘천국(하나님 나라) 복음’과 ‘그리스도(하나님 아들)의 복음’이라는 양대 산맥이 나오며, 왜 이런 구분된 차이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체계적이고 설득적인 설명과 논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맥나이트는 이 두 가지가 유사하며 같은 것이라는 방식으로 쉽게 넘어가는 듯한데,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건, 신약성경이 가진 두 초점을 흐릿하게 만들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하나님 아들의 복음의 상관관계가 보다 명확히 제시될 때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개인구원주의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넷째, 이 책에 구원주의 자체에 대한 깊은 분석이 미비한 점은 또 다른 한계이다. 왜냐하면 그의 논제의 반쪽은 현대 교회가 구원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주의의 실체를 어느 정도 자세히 밝혀야 한다.) 맥나이트는 대담하게도 종교개혁 때부터 ‘구원의 문화’가 시작하여 현재의 구원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5장은 ‘어떻게 구원이 복음을 압도하게 되었을까?’라는 제목으로 그 주장을 펼쳐간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자는 이런 현상이 등장한 시점(즉, 종교개혁 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그가 제목으로 삼았던 ‘어떻게’에 대해서는 사실 제대로 말하지 않고 있다. 서평자는 이 ‘어떻게’에 큰 관심을 가진 한 독자로서 이 제목을 보고 ‘어떻게’에 관심을 갖고 5장을 읽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언제(때)’뿐이었다. 구원주의에 빠진 이유와 원인분석뿐 아니라, 구원주의가 발전하는 단계의 역사적 모습, 더 나아가 구원주의가 지금 현재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분포되어 있는지를 아는 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체계적인 분석과 이해가 결국 구원주의에 빠진 복음주의 교회를 구해낼 수 있는 출구를 찾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자는 이런 분석과 연구 없이 ‘구원의 문화’에서 ‘복음의 문화’로의 이동을 말한다. 자연히 이 대안이 얼마나 설득적이며 효과적일지 의문이 든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몇 가지 세부적인 의문 또한 피하기 힘들다.
(1) 5장에 나타난 저자의 논지를 뒤집어 보면 종교개혁 전까지는 구원보다 복음이 모든 것을 규정했던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세가톨릭은 복음을 제대로 고수하면서 ‘복음의 문화’를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중세가톨릭이 복음을 온전히 고수하지 못했기에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가 복음에 대한 강조점을 들고 나왔고 그래서 루터교회, 개신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부르는 역사적 흐름이 생긴 게 아닌가? 루터의 복음주의가 ‘칭의주의’와 ‘구원주의’로 흐르는 방향을 만든 것은 문제일지라도, 그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무너져있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일정부분 회복시켰다는 점은 분명 평가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복음의 문화’가 있다는 점이 곧 ‘복음’을 고수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기 힘들지 않는가?
(2) 맥나이트가 10장에서 ‘복음의 문화’를 기대하며 제공한 방향과 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이며 또한 얼마만큼 적절한 해결책인지가 의문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구원주의’의 기원과 양상과 발전 모습 등을 자세히 분석하지 않은 채, ‘복음주의’의 구원 이해를 제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다시 말해 (10장에서 제시한) 복음의 문화가 그렇게 쉽게 구원의 문화를 대치할 거라는 생각은 작금의 ‘구원주의’를 너무 말랑하게 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다. 적어도 500년 정도를 유지해 온 ‘구원주의’라면 그 나름대로의 철학과 존재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는 서평자의 추측이 허무맹랑한 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자칫하면 저자가 제공하는 복음의 문화가 단순히 초대/중세교회사 시절의 예전(禮典)중심 문화로 회귀하는 건 아닐지 우려된다.
(3) 저자가 8장의 제목을 ‘베드로의 복음’이라 붙인 건 이해하려고 여러 번 노력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8장 전체는 논리적으로는 (베드로 한 사람보다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 설교와 복음 요약을 살피는 자리다. 그렇다면 ‘사도들의 복음’이라는 제목이 타당할 텐데, 왜 굳이 ‘베드로의 복음’이라 붙였을까? 물론 사도들을 대표하는 자가 베드로이기에 대표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설명 없이 바울의 설교가 베드로의 것과 동일하다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만다.) 하지만 이 책이 가진 기본 논리 흐름으로 볼 때, 결국 베드로 한 사람에 국한하기보다는 사도들 전체의 개념을 강조하는 게 저자의 논리에 더 잘 맞지 않을까 싶다.
(4) 번역 책의 제목도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예수 왕의 복음’(밑줄은 필자 것)이란 제목은 이 책의 특징과 논지를 잘 드러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주요논지를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측면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다룬 게 아니라 (‘예수 왕의 복음’이란 번역은 이런 점을 말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가지며, ‘당신의 삶에 예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는 부제도 마찬가지다.) 복음주의가 구원주의로 대치된 점을 지적하고 진정한 예수 이야기의 복음주의로 돌아가는 길을 주장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 왕의 복음’이란 제목은 원제인 ‘The King Jesus Gospel’의 뉘앙스를 잘 살리는 것 같지도 않다. 좀 더 적절한 제목을 뽑으라면, ‘복음, 왕이신 예수’나 ‘왕이신 예수의 복음’이 나을 듯싶다. 그래야 책의 논지가 살아난다. (필자는 번역 제목을 보고 처음엔 책의 내용을 다르게 추측했다.) 또한 영문 부제인 ‘The Original Good News Revisited’를 그대로 번역하여 ‘원래 복음 다시 찾기’로 쓰는 게 (‘당신의 삶에 예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는 부제보다는) 이 책이 주는 파급력을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 듯싶다.

나가는 말

본서는 미국 복음주의의 구원주의 문제를 주로 비판한 책이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 복음주의 교회만의 문제일까? 한국 복음주의는 미국 복음주의와 직결되어 있고, 사실 미국보다도 더 깊이 구원주의에 빠져 있는 듯 보인다. 사실 이 구원주의의 문제는 현재 개신교 복음주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고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숙제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한국교회에, 더 나아가 개신교회 전체에 널리 읽힐 필요가 있다. 읽힐 뿐 아니라, 이 논지를 더 깊이 있게 논의하여 이 주제를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개신교 500년의 역사를 더욱 올바르게 세울 수 있는 길이 더 잘 보일 거다. 개신교 500주년을 코앞에 둔 지금, 개신교인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 하나 더 등장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반갑다. 개신교회가 ‘구원환원주의’ ‘칭의환원주의’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는 길이 제대로 열리길 소망한다. 복음을 복음의 자리에, 구원을 구원의 자리에, 칭의를 칭의의 자리에 제대로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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