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계 6월호] 한국루터교 목사안수 1호 김해철 전 루터대 총장

루터교회는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해 재발견된 복음의 가르침 위에 서 있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개신교파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1958년부터 시작된 탓에 막내 교단이라 불린다. 한국 루터인들은 기독교한국루터회 발전에 공헌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김해철 목사(81)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를 <신앙계 6월호>가 만났다.


루터신학원(루터신학대학교 전신) 1기 졸업생이며 한국루터교 1호 목사인 김해철 목사. 그는 가난한 농부 가정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렇기에 초등학교 때 전교 1등을 했어도 중학교에 갈 엄두를 못 냈다.

“그런데 동네 부잣집 형이 제 상황을 안타깝게 여겼는지 중학교 입학원서를 사온 거예요. 부모님 몰래 서울로 올라가 덕수상업중학교 시험을 쳤습니다. 합격했지요.”

그의 부모는 똑똑한 아들 하나라도 공부시키자며 키우던 돼지며 보리쌀 등을 팔아 중학교 등록금을 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입학한지 4개월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아, 이제는 그만하라는…. 이것이 운명이구나 생각했어요. 부모님을 도와드리며 살아야겠다 싶어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래도 상업중학교 4개월 다녔다고 그 덕에 금융조합에 취직해 금전출납과 급사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이곳 금융조합에서 근무할 때 하나님을 만났다. 고개 중에 곤지암초등학교 교사가 있었는데 한 주일에 두 세 번씩 저축하러 들러서 꼭 전도를 했다. 그런데 그를 거절할 입자이 못됐다. 남동생의 담임인데다가 김 목사의 초등학교 2년 선배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뜨거워져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할 즈음, 지원상 전도사의 알버트 슈바이처박사의 희생적 삶에 대한 설교는 스무 살 청년 김해철의 마음을 흔들어 놨다. 그의 시선은 곧장 전쟁 통에 영양실조와 온갖 피부병에 시달리며 위생상태가 엉망인 아이들에게 쏠렸다.

월급을 받자마자 고약과 소독용 약품, 이발 기구 등을 샀다. 그리고는 주일이면 아이들을 데려다가 머리를 깎아주고 고름을 짜내며 약을 발라줬다. 이 모습을 본 그의 아버지는 “저놈 때문에 집안 망하게 생겼다”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이 같은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을 들은 지 6개월 만에 목사가 되겠노라 결심, 무조건 서울로 올라갔다. 중학교 1학년 그것도 4개월 다닌 학력이 전부였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중고등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들어가자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신학교에 입학할 때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목사 안수를 받는다고 하자 ‘이제는 어쩔 수 없다’며 그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가셨습니다. 동생들은 진작부터 믿었고요.”

기장 소속 신학교를 다녔던 그가 루터교 목사가 된 것은 흥미롭다. 한신대 출강 중이던 지원용 박사가 루터교신학원을 세우고 대학원 과정 학생을 모집했다. 이때 지원상 목사의 권유로 입학했다. 1965년 3월의 일이었다.

“큰 교단을 놔두고 고생을 자초한다고들 우려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루터교신학원의 1호 학생, 안수 1호가 돼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루터신학원을 1기로 졸업한 후,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를 취득한 그는 국내에 돌아와 6개 교회에서 목회했으며, 이 중 두 개 교회를 개척했다. 1975년 개척한 부산제일교회와 1998년 63세의 나이에 루터대학교 내에 개척한 팔복교회가 그것이다.

김해철 목사와 루터대학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79년 당시 루터교신학원 원장 도로우 박사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1년간 가게 되면서 원장대행 겸 학감으로 1년간 섬겼다. 이후 목회를 하면서도 22년간 교수로 사역했다.

기독교한국루터회 2대 총회장이 되면서는 1994년 ‘루터란 비전 2000’을 선언, ‘한 평 짓기 운동’을 통해 루터신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킬 준비를 했다.

그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1997년 루터대학교가 됐고, 2003년 지금의 루터대학교가 됐다.

또한 75세 때 다시 루터대 총장직을 맡아 2014년 퇴임했다.

“목사로서의 소명, 교수로서의 소명, 그리고 총회장으로서의 소명….  이 모든 소명이 막중하고 어려웠지만 잘 감당하고 보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또한 한 번도 목사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고 목사로서의 삶이 가장 보람됐습니다.”

[인터뷰 전문은 <신앙계 6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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