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을 보내며 반 고흐가 부친의 영전에 바친 그림 한 점이 교회의 본질을 묵상하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성경이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Bible, 1885)은 화가로 활동한 10 년 남짓한 그의 생애 중 파리에서 인상파를 접하기 전 네덜란드에서의 어두운 색조와 사실주의 초기 화풍이 나타나는 작품이다.
반 고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였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가 1885년 3월 26일 작고한 후 생전에 부친과 불화하였던 자신을 뉘우치는 마음과 내면의 신앙을 이 작품에 담았다.
화면의 중앙에는 어두운 심연을 배경으로(against a black background, Letter 429) 말씀이 적힌 흰색 지면이 펼쳐진 성경이 놓여 있다.소재가 된 성경은 아버지가 읽던 가족성경으로 아버지 자신을 뜻하며, 그 옆의 불 꺼진 촛불은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았던 목사이며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이제 생을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두툼하고 정돈된 이미지의 성경과 달리 그 앞에 던져진 것처럼 놓인 밝은 레몬 색 표지의 얇은 책은 당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Émile Zola)의 소설 ‘생의 기쁨’(La joie de vivre) 이다.여러 차례 읽혀진 이 책은 에밀 졸라로 표방되는 19세기 후반의 이념과 사상을 쫓아온 반 고흐 자신을 의미한다.
성직자를 지망해 신학수업을 받기도 하였고(1878), 보리나주(Borinage) 광산촌에서 설교자로 광부들의 입장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하다가(1878/79) 교회와 사회의 편견에 의해 해고당한 후 기성교회에 대해 비판적이던 그가 부친의 영전에 고개 숙인 모습을 회화로 표현하고 있다.어둠을 배경으로 흰색 지면으로 펼쳐진 성경의 내용은 오른쪽 상단의 문자 ISAIE와 그 아래 로마숫자 LIII이 반 고흐의 부친이 일생의 신앙신조로 여기며 삶으로 추구해온 이사야서 53장 ‘고난의 종’에 대한 말씀임을 가리켜준다.
자녀들의 학비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할 만큼 청빈하였지만 모든 이들에게 경건의 귀감으로 존경받아 온 아버지를 아들이 마음 깊숙히 추념하고 있다.세상을 구원하시고 섬기기 위해 고난의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으로 교회의 본질을 구현하고자 한 아버지의 믿음과 삶을 아들이 기리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 4-6)
그밖에 외젠느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모사해 제작한 ‘선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은 형태보다도 색채로 작가의 감정을 나타내려한 그의 후기 인상주의(Post-Impressionism) 경향의 작품이다.
화가로서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교회의 본질에 대한 고뇌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자들에 대한 그의 인류애가 나타나 있다.임파스토(impasto, 붓자국이 남게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을 사용해 밤하늘의 소용돌이 치는 듯한 힘과 운동력, 조용한 마을 풍경으로 고요한 격정을 표현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1889)은 형제들의 몰이해를 초래한 요셉의 열한 개의 별과 달(창 37: 9)이 비추는 하늘에 사이프러스 나무(자연)와 교회의 첨탑이 잇닿아 있다.
종종 불 꺼진 교회의 모습이 기독교와 단절한 그의 작품 세계를 표현한다고 오해되어 왔다. 하지만 화면의 교회는 아버지가 시무하던 누에넨(Nuenen)에서의 가족과의 추억이 담긴 교회의 모습이다.오히려 이 그림을 통해 세상의 몰이해에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내면세계의 고독과 교회의 본질을 추구한 고향 교회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고 본다.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C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