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도목사기념사업회, ‘85주기 추모예배 및 제11회 정기총회’ 개최

“할아버지(손정도 목사)께서는 후손들에게 한결같이 ‘걸레의 삶, 즉 비단옷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반면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되는, 그만큼 중요한 도구인 걸레와 같은 삶을 택해 불쌍한 우리 동포들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 22일 전용재 감독이 손정도 목사 추모예배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남북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는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 85주기를 맞아 그의 후손들과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모여 그의 ‘걸레의 삶’과 ‘하나님사랑 나라사랑’의 정신을 추모했다.

애국지사손정도목사기념사업회(대표회장 전용재 감독)는 22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 17층에서 ‘제11회 정기총회 및 애국지사 손정도 85주기 추모예배’를 개최했다.

추모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전용재 기감 감독회장은 “오늘날 이기적인 크리스천이 양산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목사님처럼 나라와 민족과 시대를 위해 자기를 내던질 줄 아는 즉 보람 있는 일에 자신을 바칠 줄 아는 크리스천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설교했다.

손 목사의 장손자인 손명원 장로는 “‘비록 나는 더러워지더라도 내가 지나간 자리는 깨끗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매일 필요로 하지만 자신의 일을 성실히 완수한 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또 다시 내일의 필요를 위해 기다리는 것이 걸레’라 했던 할아버지 걸레 철학이 기념사업회의 철학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인사말 했다.

손정도 목사(1872-1931)는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부 총장을 지내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감리교 목사로서 한 때 남한보다 북한에서 더 존경받은(지금도 여전하다) 독립운동가다.

손정도 목사가 새롭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 사후 북한에서 손정도 목사의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유훈을 따라 김정일이 1994년 아버지의 친구이며 손정도 목사의 둘째 아들인 손원태 박사(당시 미국 거주)를 초청, 평양에서 팔순잔치를 치러 주는 일이 있은 후였다.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회고록에 의하면 손 목사의 중학교(숭실) 2년 선배인 김형직의 아들인 김일성은 '어머니를 모시고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라'는 김형직의 유언을 듣고 1926년 길림에 살고 있던 손 목사를 찾아갔고, 손정도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신앙의 지도를 받았다.

손 목사는 청년 김일성에게 신앙의 스승일 뿐 아니라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김일성이 청년시절 중국 길림에서 만주군벌에 잡혀 감옥에 있을 때, 손 목사의 노력으로 김일성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1872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난 손 목사는 1902년 과거를 보기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 조씨 성을 가진 목사님 댁에서 투숙한 게 인연이 돼 조 목사의 전도를 받아 상투를 자르고 기독교인이 됐다.

그후 그는 집안에서 미친 자식 취급을 받게 됐고 결국 집을 떠나 고학을 하며, 1908년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를 졸업한다. 후에 그는 1910년 협성신학당(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11년 목사 안수를 받고 만주지역 동포들을 위한 순회선교사로 첫 파송을 받았다.

복음전도와 독립운동에 열중하던 그는 1912년 가쓰라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돼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1년 동안 전남 진도에서 살이를 하기도 했다.

1914-15년 동대문교회 담임 시절에는 700명이 넘는 교인이 출석할 정도였으며, 1915-18년 정동교회 담임 시절에는 2,300명이 출석하는 큰 교회로 부흥시키기도 했다. 이 때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는 2년간 이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사랑 나라사랑을 배웠다.

▲ 손정도 목시
1918년 겨울, 손 목사는 정동교회에서 시무한 지 3년 만에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상하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1919년 임시의정원 조직을 발의해 상해임시정부 수립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출범시키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임정 내부의 파벌 싸움에 진저리가 난 손 목사는 1921년 길림으로 떠나 그곳에서 자신의 가산을 다 팔아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오갈 데 없는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해줬다.

아울러 이념과 노선에 관계없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1931년 추운 겨울 만주 땅 길림에서 49세의 젊은 나이로 주님 품에 안겼다.

민족운동가로서 조국 광복의 날도 보지 못하고 망명지인 타국에서 생애를 마친 그의 부음 소식은 1931년 2월 21일 동아일보에 보도돼 전 국민에게 알려졌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은 애도했다.

정부는 1996년 9월 11일 국내로 그 유해를 봉환하였고, 12일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그의 장남은 손원일.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다. 6.25때 부산항으로 직행 침투하려던 인민군 선박을 격침시켜 부산의 안전을 확보한 인물로, 인천 상륙 작전 등 작전에서 해군 참모 총장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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