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계 3월호] 한국교회 대표적 지성인 박종화 경동교회 원로목사

한국교회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꼽히는 박종화 목사는 1945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한신대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거쳐 독일 튀빙겐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6년간 독일 뷔르템베르크교회 총회 및 독일 서남 선교본부 협동선교사로 사역했으며, 한신대 교수와 기장 총무를 지낸 후 1999년부터 경동교회 담임목사로 섬기다 지난해 은퇴한 그를 <신앙계 3월호>가 만났다.



해방둥이인 박종화 목사는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준형 목사는 가족 중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같은 교회에서 어머니를 만나 가족 전체를 복음화 시켰다.

아버지 포함 형제 다섯 명이 모두 목사가 됐다. 그리고 대를 이어 박 목사와 그 아래 동생이 목사가 됐고, 지금 박 목사의 아들도 3대째 목사가 돼 주의 길을 걷고 있다. 박 목사가 목사가 된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장남은 무조건 주의 종으로 드리겠다고 한 아버지 서원기도의 응답인 것이다.

20대 때는 신학공부에 매진했고 육군 군목으로 봉직해 대위로 전역했다. 나이 서른에는 한국과 독일 선교교환의 첫 사례로 독일로 건너가 6년간 순회목사로 사역했고, 이후 세계적 석학인 위르겐 몰트만 교수 밑에서 수학했다.

박 목사는 독일 남부지역 350여 개의 교회를 순회하며 협동선교사로 섬겼을 때 독일 교회의 이웃사랑을 몸소 체험했다.

또 한 가지 배운 것은 바로 ‘민주주의’다. 독일이라는 나라는 절대 다수당을 두지 않는 정치제도 속에서 당끼리 화합하는 연정이나 정책연합으로 사회문제를 풀어나간다. 다양함 속에 일치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연립해야 한다.

이렇듯 10년간의 독일생활은 타문화와 전통 및 화합, 민주주의 등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모교(한신대)로 돌아와 10년간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후 교단(기장) 총무직을 수행하던 1999년 경동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개교회 목회를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부르심에 순종해 16년간 사역했다.

“교회가 하나의 오케스트라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도들은 다 악기 하나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입니다. 성격을 악보 삼아 이것을 잘 사용하게 하고,화음을 만들어내는 이가 목회자입니다. 간혹 성도 중에 자기 소리만 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집에 가서 하고 모였을 때는 화음이 돼야 합니다. 다양성 속에서의 합일이 화음입니다.”

박 목사의 삶에도 굴곡은 있었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 않나. 2010년 12월, 그의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도 감기가 낫지 않아 찾아간 병원에서 뜻밖에 편도암 3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16시간의 수술 끝에 살아온 그는 회복과정을 통해 치유란 몸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도 함께 치유돼야 함을 알게 됐다. 바로 전인구원이다.

병상 이후 성도들의 아픔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의 위로자가 됐을 뿐 아니라 그의 설교도 달라졌다. 학문적 설교에서 전인적 설교로 바뀐 것이다.

박 목사는 오랫동안 대북 지원과 남북화해 활동에 주력해 왔다. 그에게 통일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문화, 예술, 스초츠, 관광 등 쉬운 것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점진적으로 같은 하나를 찾아가다 보면 어느새 하나가 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란다.

지난해 말 은퇴예배를 끝으로 원로목사가 된 박종화 목사는 “특별한 삶에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 새로운 영역에서 봉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아름답게 하모니를 이루는 교회, 세상, 나아가 통일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계속된다.

[인터뷰 원문은 <신앙계 3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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