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송영춘 목사, 3년 만에 카페교회서 천막교회 거쳐 건물교회로

교회개척이 너무도 힘들다고 하는 상황에서 50이 넘은 나이에 목사가 돼, 카페교회 개척 3년 만에 천막교회를 거쳐 건물교회로 교회의 외형을 달리한 목회자가 있다. 건축과 관련 어려움에 처한 교회 건물을 인수해 첫 사역으로 40일 새벽기도회를 인도 중인 송영춘 목사를 만났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2로에 소재한 아멘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송영춘 목사. 늦깎이 목사인 그는 오랜 시간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아들로 더 많이 불렸다. ‘탤런트 송재호의 장남 송영춘’. 이는 그에게는 영광보다는 부담이었고 짐이었다.

1982년 대학시절 그는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 속편’의 주인공으로 발탁돼서 1편에 나왔던 송재호 장로와 함께 부자가 한 영화에 출연해 큰 화제를 모았다. (송재호 장로는 1975년 상영된 ‘영자의 전성시대’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인공으로서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영화 촬영 마친 다음날 군에 입대한 때문이다. 영화 개봉소삭과 흥행소식은 군대에서 들었다. 휴가 가서 영화를 보고 온 고참들이 그를 알아보고 다른 부대원들에게 그가 주인공인 소식을 알려줄 정도였다.

그러나 군 생활 중 그는 유명인의 아들, 연기자 또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구타를 당했다. 결국 그는 허리를 다쳐 수술을 하고 의가사제대를 했다. 그때부터 그는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다. 영화배우의 길을 접은 것은 물론이다.

“남들보다 일찍 제대한 것이 행운일 수 있는데 이상하게 ‘너희는 건강한데 나는 왜 힘들고 아파야 돼’하는 반항심이 생겨 술 담배에 절어 방황하는 시기를 보내느라 영화를 해야 하는 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저한테 ‘아들아, 네가 술하고 그렇게 한 것은 내가 아는데 노름하고 마약은 한 해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부모님 속을 썩였단 20대였습니다.”

그렇게 방황하던 시기였지만 젊은 날 그는 사업도 직장생활도 하는 일마다 성공했다. 승승장구하면서 부와 쾌락을 좇았다. 특히 ‘스톤워시’ 처리한 청바지로 시장을 개척해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다. 하루에 대학등록금 두 학기 분이 넘는 수입이 매일 수중에 들어왔다.

그는 1988년 대우자동차에 입사를 해 다니던 중 1991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무대디자인, 건축공간 연출을 전공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1996년 무대장치 및 실내건축업을 경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신앙으로 교회만 다니던 그를 하나님이 직접 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신앙생활은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송재호 장로의 개종과 함께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서 했던 수동적인 신앙생활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자꾸 감시하는 눈동자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을 떨쳐보려 갖은 애를 썼으나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 부모님은 새벽기도도 나가보셨는데..’하는 생각이 들어 막연하게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그러다 ‘어머님께서 금식기도 많이 하셨는데..’라는 생각이 나 ‘가도 금식기도 한 번 해볼까’ 생각이 들어 오산리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압박을 이겨내는 힘은 하나님 당신 밖에 없다는 사인을 주신 것 같습니다.”

금식기도 4일째 되던 날 개인기도굴에 들어가 기도했다. 처음엔 형식적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불과 얼마 후 그는 회개의 은혜를 체험했다. 큰 힘에 의지해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게 된 것이다.

“처참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정말 무서울 만큼 하나님은 아주 작은 죄까지도 낱낱이 보여 주시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새벽 2시가 됐나 생각이 드는데 갑자기 내 마음 속에 평온함이 찾아들더니 그 평온함과 함께 내 앞에 정확하게 한글로 된 글씨가 보여집니다. ‘다 끝났다!’”

죄 씻음을 받고 나오자 길거리의 쓰레기조차 아름다워 보일 뿐 아니라 그렇게 즐기던 술, 담배가 생각만 해도 싫어질 정도로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됐다.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의 행위나 태도는 말할 것도 없다.

성경 필사를 하던 그는 자신이 성경을 너무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성경을 더 알고  싶어 2005년 신학교(루터대학교)에 입학했다. 불혹을 넘은 나이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어 그의 신학공부를 기뻐하셨다.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중 이전에 두어 번 신청했으나 반려됐던 국가유공자 선정 건을 보훈처에서 다시 연락을 해와 검사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선정되는 일이 일어났다. 학비를 면제 받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계셨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직접 가르치시려고 학비 면제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셨구나. 작은 것 하나까지도 계획하시고 이끄시는데 그것을 몰라 그렇게 방탕하게 살았구나..’ 생각 돼 2, 3개월은 울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성경을 알고 싶어 신학교에 진학한 그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쓰기기 위해서 이곳에 데려 놓으셨구나’하는 생각이 누적이 돼, 자신도 모르게 ‘나는 목회의 길을 가야 하는구나’ 자연스레 생각돼 신학대학원(서울장신대)에 입학, 사역의 길을 걷게 됐다.

신학교에 다니던 중 보배로운교회에서 청년부 사역자로 목회의 길을 시작했다. 비록 자신은 아버지 때문에 교회에 다닌 선데이 크리스천이어서 청년부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방황했던 청년기를 보냈기에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열심히 사역했고 그 결과 청년부가 크게 성장하는 은혜를 맛볼 수 있었다.

“제가 살았던 그 악(惡) 속에서 가지고 있던 그 경험, 쓰라린 경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100% 사용하셔서 다시 쓰임 받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학교에  재학하는 중에도 받은 은사를 나누어 머물 곳이 없는 선교사들을 위해 단독주택을 세를 내 선교관으로 운영하며 지금까지 섬겨 오고 있다.

보배로운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그는 2012년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 옆 카페에서 아멘교회를 개척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중 산책하다 들른 사람이 차를 마시다 그가 전도사인 것과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것을 알고 예배에 참석하는 등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해 1년 만에 30명 가까이 모였다.

그러자 교인들은 예배 처소를 위해 천막교회를 짓자고 해서 카페 근처 공터를 얻어 천막교회를 지어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중 인근에 건축과 관련 어려움에 처한 교회의 요청으로 교회를 인수, 새로 입당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당장 예배공간이 협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단이 그 교회를 인수하려 한다는 얘기가 있고 그 지역은 새로 개발된 아파트 단지여서 그곳의 많은 영혼들을 이단들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마음에 교인들이 적극 나선 것이다.

지난해 4월 목사 안수를 받은 송영춘 목사. 그는 하나님께서 기존 아멘교회 교인 외에 더 붙여 주신 현재 남아 있는 교인들과 그리고 새 예배당에 새로 보내 주시는 이들과 함께 아멘교회를 ‘순종이 있어 역사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시는 교회’로 만들어 가고자 한다.

“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사 지금의 이 자리에 오게 하신 하나님께서, 아멘교회의 유형을 카페교회에서 천막교회로 그리고 다시 건물교회로 바꿔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 아멘교회를 통해서 또 무엇을 바꿔 나가실지 하나님의 솜씨를 기대하며 기대를 갖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따라가렵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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