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계 11월호] ‘한국의 남자 헬렌 켈러’ 실로암병원 원장 김선태 목사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교회를 시작으로 복지관, 재활원, 학습지원센터, 요양원 등을 설립해 시각 장애인들의 복지와 시각 장애인 세계의 발전을 위해 앞장서 온 ‘한국의 남자 헬렌 켈러’ 김선태 목사를 <신앙계> 11월호가 만났다.


김선태 목사는 실로암안과병원 설립의 주역으로 2004년부터 병원장으로 섬기며 무료 개안수술을 통해 3만 명이 넘는 이들에게 빛을 찾아 주었고, 무료 안과검진을 통해 실명을 예방하고 눈으로 인한 고통을 치료해 준 사람만 해도 수십만 명에 이른다.

1941년에 태어난 김선태 목사는 6.25전쟁을 통해 부모는 물론 시력마저 잃었다.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께서 주신 용기와 비전으로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실대를 거쳐 장신대 신대원에서 석사, 미국 메코믹신대원에서 목회학 박사를 취득했다.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영혼의 눈을 뜬 곧 하늘의 빛을 찾은 김선태 목사. 그가 살아온 인생의 모든 페이지에는 희망의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 있기에 그의 두 눈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더 맑고 밝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 대대로 미신을 숭배해 온 집안이지만 어린 김선태는 교회가 좋았고,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재미있고 좋았다. 그래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숱한 삶의 고비 때마다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했다.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 말씀은 위기 때마다 그를 무릎 꿇고 기도하게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6.25전쟁이 났습니다. 저희 집이 폭격을 당해 한순간에 부모님을 잃어 저는 고아가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느날 배가 고파 친구들과 논두렁에 나갔다가 폭탄이 터져 친구들은 모두 죽고 멀리 떨어져 있던 저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고로 저는 눈을 잃었습니다.”

살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지만 열 살 나이에 전쟁고아요, 절망적인 시각장애인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가 살면서 힘들 때마다 심지어 사경을 헤맬 때도 하나님께서는 돕는 이들을 보내그를 도와주셨다.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그는 정상인등과 함께 공부하며 경쟁해야 했다. 시각 장애인이 정상인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매일 밤 12시까지 공부하고, 새벽 5시면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후 학교를 가는 생활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그 결과 대학교는 물론 신대원을 마쳤고,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정상인 교회에서 부목사3년을 사역하던 그는 1972년 1월 처음으로 한국맹인연합교회를 시작했다. 이를 기점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에 나섰다.

점자 성경과 찬송가 10만 여권을 무료로 보급했다. 1천 2백 명이 넘는 신앙 좋은 시각 장애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센터와 복지관과 직업 재활원을 설립했다.

시각 중복장애인들을 위한 학습지원센터와 고령의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요양원도 세웠다.

김선태 목사의 시각 장애인들에게 빛을 찾아 주고 희망을 나르는 일은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로 향하고 있다.

“생전에 한경직 목사님께서 실로암안과병원을 통해 국내 뿐 아니라 국외의 시각 장애인도 도우라는 말씀을 늘 하셨습니다. 그래서 중국 연길을 비롯해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탄자니아 등에 있는 시각 장애인들에게 무료 개안수술을 해 주는 사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앞으로는 베트남 등 더 많은 아시아 개발도상국가들에 눈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강도 만난 자들과 같은  이를 위해 김 목사는 많은 이들이 선한 이웃이 돼 주기를 소망한다.

[인터뷰 원문은 <신앙계> 11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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