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계 10월호] 기감 서울연회 감독 역임 박춘화 창천교회 원로목사

신촌 대학가 중심부에 두 개의 높은 탑을 자랑하고 있는 창천교회. 1966년 이 교회 부목사를 거쳐 1971년 담임목사로 취임, 1996-98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감독을 거쳐 2007년 은퇴해 원로목사로 사역 중인 창천교회 박춘화 목사를 <신앙계 10월호>가 만났다.


박춘화 목사(감리교 교인들은 박춘화 감독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다)는 창천교회 옆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적 ‘검사와 여선생’이라는 영화를 보고 소외되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검사가 되고자 했지만, 고 2때 수련회를 통해 주님을 만나면서 목회자를 꿈꿨고, 그 꿈을 이뤘다.

이른바 성공한 목회자로 평가받는 그이지만 아픔도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걷던 첫째 아들(고 박홍규 전도사)이 시골 목회지로 부임 받아 간지 6개월 만에 순직한 것이다.

그가 50년째 몸담고 있는 창천교회는 109년의 기나긴 교회 역사를 통해 하나님과 민족 앞에 섬김과 다음세대를 일으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을 세우는 데 앞장서 왔다.

이에 박 목사는 “역사의식을 갖고 목회했고, 교회는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바탕 위에서 그는 분명한 목회 노선을 갖고 사역했다고 한다. 전교인의 제자화와 차세대 선교를 위한 문화쉼터 사역 그리고 세계선교가 그것들이다.

특히 청년들의 방황을 예측한 그는 젊은이들을 교회로 모으는 일에 앞장섰다. 처음 2년은 교회 안에 ‘목요 쉼터’라는 이름으로, 이후 더욱 전문화된 인력을 통한 ‘문화쉼터’라는 이름으로 신촌 지역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그래서인지 창천교회는 젊은이들이 많다.

1970년 30대의 뜻있는 젊은 사역자들이 연합과 일치, 한국 기독교문화 창출, 통일 후 북한선교, 세계선교의 뜻을 품고 시작한 ‘기독교 신풍운동’의 발기인이기도 한 그는, 이제 원로회 회장으로서 지난날의 신풍운동 회고와 전망에 관한 출판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박춘화 목사는 한국교회 믿음의 후배들에게 '청빈정신 회복' 및 '신앙 회복'을 주문하는 한편으로, 교회들에게는 젊은이들이 비전을 갖도록 도와 줄 것을 당부한다.

이것들을 회복할 때 한국교회는 다시 우뚝 설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통일과 관련 “통일은 하나님의 섭리로 온다”면서 “여기서 우리가 준비할 것은 손양원 목사의 신앙과 정신”이라고 조언한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통일 한국이 되면 200년 전 스위스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때 중립 국가를 선택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을 놓고 오랫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주여, 유럽의 중립국으로 스위스가 있다면 대한민국이 아시아의 중립국이 되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인터뷰 원문은 <신앙계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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