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 교수, 세계밀알선교연합 ‘장애인신학세미나’서 주장

“차별 없이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됩니다. 그 ‘모든 자’라는 범주에 지적장애인이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 지난달 30일 총신대에서의 세미나 모습

전통적인 구원의 과정이 유일한 과정이라면 ‘불가’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가르쳤던 구원의 과정은 먼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그 전파된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 다음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 전파된 복음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는 지적장애인이나 영아는 어떻게 될까?

이러한 복잡 미묘한 질문에 대한 신학적 답을 제시하는 논문이 발표돼 관심을 모은다. 사단법인 세계밀알연합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사당동 총신대 세미나실에서 개최한 ‘장애인 신학 세미나’에서다.

이날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정승원 교수(총신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지적장애인이나 영아라도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통적 구원과는 별도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따로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 교수는 “전통적인 구원의 과정이 유일한 과정이라면 복음을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몰라서 복음을 믿는 것도, 그 내용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불가능한 지적 장애인과 영아에게는 구원받을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면서 “이는 매우 심각한 신학적 문제”라고 밝혔다.

소위 조직신학의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그리고 교회론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단의 ‘박스기사Ⅰ’ 참조)

“지적장애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가능’”

하지만 신학적으로 문제가 제기된다고 해서 지적장애인이나 영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직접적 논거는 될 수 없다. ‘지적장애인이나 영아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 곧 ‘구체적인 구원의 길’에 대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정승원 교수

이에 정 교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죄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이들에 대한 구원의 길이 따로 있음을 제시하며, 전통적인 구원의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지만 이들도 구원 받을 수 있음을 주장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단의 ‘박스기사Ⅱ
’ 참조)

정 교수는 “‘지적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제대로 진리를 알 수 있을까?’ 이런 식의 의구심이 인간 편에서 생길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구원에 이르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모든 자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지적장애인도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하는데, 그 믿음이 결코 인간의 지적 동의나 이해를 조건으로 하는 믿음은 아니다”면서 “칼빈은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복음 선포 외에 다른 ‘성령의 신비적인 방법’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고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는 신명기 1장 39절을 인용,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아이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면서 “물론 이 말씀이 영아들은 자동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선악을 분별하는 지적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따로 있음을 알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정 교수는 “어떤 방법인지 우리 지식으로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하나님은 선악을 분별할 지적 능력이 없는 영아들이나 지적장애인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갖고 계심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며 지적장애인 및 영아들에 대한 구원 가능성을 확신했다.

[지적장애인 구원에 관한 조직신학적 문제제기]

장애인의 구원과 신론

장애인의 구원을 신론에서 고찰하자면 공평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지적장애인에게 어떤 기회도 주시지 않고 지옥으로 직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디모데전서 2장 4절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과 모순이 된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분명 지적 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계획과 방법을 마련하셨을 것이다. 지적 장애인의 구원 문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문제와 뗄 수 없다. 공평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에게 지적 장애인은 어떤 존재로 비쳐지겠는가? 분명 그들의 구원을 원천적으로 차단되게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장애인의 구원과 인간론

인간론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처럼 ‘그 종류대로’(in their
own kind)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in God's image) 창조되었다(창1:25-26). 즉 인간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심지어 어머니 뱃속의 태아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적용된다(창9:6; 약3:9 참조). 상대적으로 지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신체적으로 부족하고 성숙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지적 장애인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면 (당연히 그렇지만) 그들의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지적 장애인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를 ‘그 모양대로’ 창조된 식물들과 동물들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가 사라진다. 또한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지적 장애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면 반드시 구원의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장애인의 구원과 기독룐

‘기독론’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셨다. 그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시려는 목적으로 인성(humanity)을 지니셨다. 만약 이러한 목적에 예외가 되는 인간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온전한 성육신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량에도 큰 문제가 발생한다. 온전한 성육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으로 그리스도의 속량이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적 장애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제외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어떤 차원에서 그리스도는 지적 장애인에게도 구세주가 되시는가.

장애인의 구원과 구원론

또 구원론에서는 더욱 직접적인 문제가 발생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라는 말씀은 지적 장애인들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인가?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인지할 수 없으니 예수를 믿을 수 없는 것인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의 ‘모든 사람’ 속에 지적 장애인이 제외되는가? 지적 장애인이나 영아나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10절에 선언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말씀한다. 차별이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 속에 지적 장애인도 포함되며 “차별이 없느니라”는 말씀도 지적 장애인에게 적용된다.

장애인의 구원과 교회론

교회론에서도 문제가 제기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지체들 가운데는 약하게 보이는 지체도 있고 덜 귀히 여기는 지체도 있다고 말씀한다(고전12:22-23). 만약 지적 장애인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된 지적 장애인이라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고 가정할 수 있다. 지적 장애인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교회의 일원은 될 수 있지만, 죽은 다음에는 지적 능력 결여로 인하여 복음에 지적 동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얻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 죄, 믿음을 통해서 본 지적장애인의 구원 문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지적장애인

은혜는 인간의 그 무엇에도 개입되지 않는 하나님의 전적인 것으로부터 온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은 인간의 지적 공로, 영적 공로, 행동적 공로 등이 구원에 개입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장애인이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일이다. 단지 지적으로 모자라지만 봐준다는 식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요소도 개입되면 은혜가 되지 못한다는 차원에서의 은혜다.

지적 능력이 구원의 결정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지적장애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을 더 확실하게 부각시킨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주권으로만 결정된다면 지적장애인의 구원도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결정된다고 믿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각 사람이 자기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이 택하심을 받는데, 즉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능력 차이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구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무시하는 처사라 할 수 있다.

죄와 지적장애인

지적장애인이나 지적 문제가 없는 사람이나 죄 문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다. 지적장애인이라고 해서 죄성이나 죄책이 없고, 지적 장애가 없다고 해서 자신의 어떤 능력을 통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피할 수 있지는 않다.

그러면 지적장애인은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하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지적 장애가 없는 사람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죄 문제도, 구원 문제도 인간 개인의 능력 밖의 일이다.

모든 자들이 죄 아래에 있고 모든 자들이 죄 가운데 태어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모든 자에게 차별 없이 구원의 기회가 주어져야 함은 의미한다.

믿음과 지적장애인

구원 혹은 칭의는 믿음으로 밀미암아 된다는 것이 개신교의 일반적인 전통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니라”(롬 3:22). 분명히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 개인의 믿음이 아니다. 우리의 지적 시인도 아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이 마치 인간의 동의에 의존하는 것처럼 주장한 것을 경고했다. 그리고 또 경고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믿음에 의존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동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적 능력이 없는 장애인이나 영아에게는 믿음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은 개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자신의 지적 동의와 심리적 확신이 반드시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우리 개인과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우리의 지력이나 의지력, 영력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 능력과 동의 능력이 없는 지적 장애인에게 이러한 믿음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적장애인이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믿음은 지적 동의나 이해가 필요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이다. 또한 지적장애인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거룩, 예배, 선행, 열심, 지성 등은 구원의 결과적 모습이지 조건적 모습이 아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지적장애인에게 결여돼 있다고 그에게 구원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즉, 성도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모습이지만 지적정애인은 가질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