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저, 서울: 두란노서원, 2013, 290쪽, 13,000원

들어가는 말

김세윤 교수의 「칭의와 성화: 칭의란 무엇이고, 성화란 무엇인가」는 2013년 8월에 출간되었다. 한국 개신교회가 부적절한 모습으로 욕먹고, 바울신학계에 칭의론 논쟁이 어지럽게 전개되는 때에 김세윤 교수가 이런 제목의 책을 출간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김세윤 교수는 F.F. Bruce 교수의 지도 아래 “The Origin of Paul’s Gospel”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이 논문은 1981년 출간되고, 한글역본 「바울복음의 기원」은 1994년 출간되었다.), 여러 곳에서 교수 사역을 하였고 (현재는 미국 풀러 신학대학원에 재직 중이다.) 「바울신학과 새 관점」(Paul and the New Perspective), 「그리스도와 가이사」(Christ and Caesar) 등 굵직한 학문적 저서를 집필해왔다.

또한 그는 대중 강연으로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가 이렇게 강의한 내용은 「요한복음 강해」, 「빌립보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등과 같은 책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칭의와 성화」도 이와 유사하게 김교수가 2012년 10월 29~30일 한국 두란노 바이블칼리지에서 종교개혁 기념 강의로 강의한 내용을 다시 책으로 다듬어 출간한 책이다. 원래 학술서로 출간된 책이 아니기에 이런 서평으로 다루는 것이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는 않지만, 이 강의가 한국교회에 등장한 시대적 의미와 이 책이 다루는 주제의 의미심장함을 고려하여 한번쯤 그 내용을 반추해 봄이 좋을 듯하다.

1. 배경과 의도

이 책은 강의를 기록한 책이지만 단순한 대중 강의를 넘어선 의의가 있다. 이는 이 책 뒤에 흐르는 두 가지 배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1) 하나는 한국교회 구원론에 ‘칭의’와 ‘성화’를 어떻게 자리매김하느냐의 문제이고, 2) 또 다른 하나는 이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옛 관점’과 ‘새 관점’에 대한 논의의 문제이다. 전자는 한국 개신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결국 구원론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이 구원론은 곧 칭의와 성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논의와 직결되어있다. 김교수는 다른 글에서 한국 개신교회 문제의 근원에 ‘신학적 빈곤’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신학적 빈곤의 중심에 왜곡된 칭의론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후자는 샌더스(E.P. Sanders)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1977) 이후 크게 불고 있는 율법 논쟁이 새 관점이라는 이름으로 전통적 칭의 개념에 도전장을 내민 것과 관련되어 있고, 그 새 관점의 최전선에서 라이트(N.T. Wright)가 칭의론을 색다르게 주장하는 바와 연관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통적 칭의 개념을 일정 부분 수정함으로 이 두 상황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한다. 칭의론을 보다 새롭게 이해해서 한편으로는 칭의에 대한 새 관점의 파격적 주장을 일축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교회(더 나아가서는 개신교회)의 전통적 칭의론이 윤리적 삶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지 못하는 논리적 결점을 극복하려 한다. 칭의론을 재정비하여 새 관점의 신학적 공격을 적절히 방어할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문제를 신학적 측면에서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누리려 한다.

2. 주장과 내용

저자가 채택한 해결책은 전통적 칭의론을 부분적으로 수정 확대하여 이해하려는 방식인데, 그가 제시하는 해법 방향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바울의 칭의론을 ‘하나님 나라’ 사상과 연결하는 것이고, 둘째는 칭의론을 ‘유대적 종말론’ 배경에서 해석하는 길이다. 그에 따르면 바울의 칭의론은 결국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사상이 신학적으로 전환되어 나타난 설명일 뿐 아니라, 유대 종말론의 사고 체계에서 서술된 사상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점을 잘 이해하면, 칭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끌어들이는 개념이 되고, 자연히 순종의 삶, 즉 성화를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이 된다. 또한 이런 칭의 개념은 칭의를 구원의 과거 사건으로만 국한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소명 사상을 더욱 부각함으로써 개인윤리뿐 아니라 칭의의 사회 윤리 측면까지 내다볼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이런 주장을 네 단계로 진행한 후(1~4장) 정리한다(5장). 먼저는 개신교 칭의론이 가진 논쟁을 소개하고(1장), 그 논쟁의 해결 대안으로 칭의론의 법정적 의미와 관계적 의미의 통합을 말한다(2장). 그 통합의 기초는 칭의론과 하나님 나라 사상을 연결하는 데 있으며(3장), 이런 해결책이 결국 믿음과 행함, 칭의와 심판을 적절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한다(4장). 이런 그의 주장은 마지막에 다시 정리 요약된다(5장).

1장은 개신교의 전통적 칭의론 입장을 말하고, 그 입장에 어떤 도전이 있었으며, 현재 그 논쟁이 어떠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설명한다. 개신교의 전통적 칭의론은 예수의 죽음을 ‘형법적’(penal) ‘대신적 속죄 행위’(substitutionary atonement)로 해석하며(p. 15), 신자의 의인됨을 ‘무죄 선언’(acquittal)으로 ‘의인이라는 신분을 얻게 됨’이라고 이해한다(p. 16). 하지만 이런 전통적 입장에 대한 학자들의 반론이 지속적으로 있었다. 저자는 칭의론을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브레데(W. Wrede)와 슈바이처(A. Schweitzer)의 입장과, 유대교가 율법주의일 수 없다고 생각한 몬테피오레(C. Montefiore)와 쇕스(H.J. Schoeps)의 입장을 간략히 언급한 후, 이어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새 관점 학파(던과 라이트)의 시각을 길게 소개한다. 새 관점은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기초하여 바울서신 안에 등장하는 칭의론이 유대인의 민족적 우월주의와 논쟁한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 됨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며, 결국 선교적, 사회학적, 교회론적 갈등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저자는 이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두 가지 점을 지적한다. 1) 새 관점 입장의 바울 본문 해석이 적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2) 새 관점이 기초하고 있는 ‘언약적 율법주의’ 이해도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새 관점의 공로를 일부 인정하면서, 새 관점과 옛 관점을 일정부분 통합하여 바라보자는 라이트의 제안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 통합 방식은 라이트가 「톰 라이트의 바울」(Paul: In Fresh Perspective)에서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옛 관점의 기초 위에 칭의의 선교적, 교회론적 함의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교수에게 그 방법은 칭의론과 하나님 나라를 엮는 방식이다.

2장에서 저자는 칭의론 논쟁의 해결책이 칭의에 대한 법정적 해석과 관계적 해석의 통합에 있다고 말한다. 바울에게 예수의 죽음은 종말론적 속죄의 죽음인데, 이 속죄의 죽음을 형법적 대신(penal substitution)으로 이해하는 방식과(예컨대, 크랜필드), 죄를 씻어 덮어버리는 희생 제사(expiatory sacrifice)로 이해하는 방식(예컨대, 케제만)이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 의의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고, 후자는 관계적 의의 개념으로 보려고 한다. 법정적 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을 말하는 반면, 관계적 의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죄를 덮어주는 것을 말한다. 김교수는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이 어떻게 통합되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결국 이 두 가지가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칭의에는 ‘이미’와 ‘아직’의 요소가 있는데, 전통적 칭의론은 칭의와 성화를 시간적 측면에서 구조적으로 분리하였기에 칭의가 가진 이미와 아직의 요소를 잘 드러내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새 관점 입장은 전통적 칭의론의 한계를 잘 지적한 셈이다. 하지만 사실 케제만은 칭의를 ‘주권의 전이’라는 개념으로 봄으로 칭의론에 현재적 윤리가 들어갈 자리를 이미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김교수는 이런 점을 더 발전시켜서 칭의를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서 이해하는 길이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이라고 지적한다.

3장은 바울의 칭의론을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전통적 시각은 칭의를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게 설명함으로 바울의 칭의론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구원론적 칭의론으로 설명했다. 로마서가 이점을 잘 보여준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 아들의 통치의 복음(참조. 롬 1:3-4; 15:12; 16:20 등),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로마서의 본론인) 칭의론을 양쪽에서 둘러 싼 형태로 등장하는데, 이는 바울의 칭의론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직결된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이러한 점은 복음에 대한 정의가 머리말에 한 번 기독론적으로 등장하고(1:3-4), 본론의 논제 자리에 또 다시 구원론적 정의로 등장하는 점(1:16-17)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도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복음을 정의한 후(1:16) 본론에서 칭의론을 전개한다. 또한 데살로니가전서와 고린도전후서 등에서도 칭의론은 간접적으로 하나님 아들의 복음이란 생각과 겹쳐져 있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살전 1:9-10; 4:14; 5:9-10; 고전 15:23-28; 53-057; 고후 3:7-8; 5:11-21). 이러한 관찰들은 칭의 받음이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됨과 직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성령으로 주의 통치를 받아가며 의의 열매를 맺는 삶임을 함의한다. 이런 점에서 성화는 구원받는 순서로서 칭의의 다음 단계가 아니다. 칭의와 성화는 모두 ‘같은 실재를 말하는 다른 그림 언어들’(p. 180)로 공히 과거, 현재, 종말의 요소를 가진다. 다만 칭의는 법정적 측면을 보여주고, 성화는 제의적 측면을 묘사할 뿐이다. 전통적 시각에서 말하는 ‘성화’는 칭의의 현재성을 제한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적절하지 못하다. 반면 칭의와 성화를 이렇게 넓게 바라볼 때, 전통적 칭의론이 직면한 윤리 부재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칭의 복음이 가진 사회적, 선교적, 문화적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 있다.

김교수는 4장에서 자신의 해결책이 칭의와 성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복잡한 주제와 의문을 어떻게 적절히 설명하고 해결하는지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칭의와 성화는 모두 삼위 하나님의 은혜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자연히 성령의 역사는 ‘의의 열매’와 연결되어야 한다. 마태복음의 ‘의’와 바울 칭의론의 ‘의’가 서로 상반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초점만 다를 뿐 동질의 것이다. 바울은 무죄 선언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진입함을 강조한 반면, 마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해서 받고 사는 것’(p. 206)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바울의 칭의론은 의로운 삶을 당연히 요구하는데, 이는 소명사상까지도 포함한다. 은혜와 소명이 칭의론 안에서 함께 내포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화를 이룬 사람이 구원과 더불어 추가 상급을 받는다는 이론은 잘못되었다. 김교수에 따르면, 고린도전서 3:5-15은 차등상급론을 말하는 본문이 아니라, (구원은 칭의로 말미암지만) 칭의 구원 아래에서 신자의 삶의 잘잘못이 적절히 평가됨을 말한다. 소명의식으로 잘 산 모습은 최종 심판 때에 남게 되고, 엉터리로 행한 모습은 모두 불타 버릴 것이라는 뜻이다. 김교수는 한번 칭의 받으면 어떻게 살더라도 자동으로 끝까지 구원받는다는 구원파식 신앙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성경은 로마서 8:28-29처럼 ‘성도의 견인’을 말하는 본문도 있지만, 동시에 히브리서 6:9-10처럼 ‘탈락의 가능성’을 말하는 본문도 있기에, ‘아르미니안주의식으로 예정과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약화시켜서도 안되고, 칼빈주의식으로 타락의 가능성을 사실상 부인해서도 안된다.’(p. 270)고 말한다. 칭의 된 사람도 칭의의 현재 단계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순종의 삶을 살지 않는 자는 구원에서 탈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가 주이시다.”라는 신앙을 저버리고 사실상 사탄을 주로 섬기는 사람’(p. 264)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의 견인’과 ‘탈락의 가능성’ 사이의 긴장감을 가지고 살 필요가 있다.

5장은 1~4장의 논리를 요약하며 결론을 제시한다. 김교수에 따르면, 바울의 칭의론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재발견되었지만, 주로 법정적으로만 이해되면서 윤리가 소홀해지는 약점을 가졌다. 그래서 옛 신학자들은 ‘구원의 서정론’으로 이 약점을 극복하려 했고, 칭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즉,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구원의 서정론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된 두 개의 차원으로 설명하고, 이것이 예정론과 견인론과 잘못 엮임으로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런 이론의 한계는 이미 여러 학자들에게 지적되었고, 새 관점의 주장에서 그 약점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바울의 칭의론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p. 285)이라는 점을 잘 이해하여 설명하면, 문제는 사라진다. 칭의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 되기’(p. 286)로 보면 칭의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음을 알게 되고, 결국 칭의론이 의로운 삶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 개념의 성화는 바울이 말하는 칭의의 현재 단계이며, 따라서 칭의와 성화는 같은 것을 다른 그림으로 표현한 용어임을 깨닫게 된다고 김교수는 강조한다. 또한 칭의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기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자의 바른 삶은 자연히 칭의와 분리될 수 없고, 사랑의 이중 계명을 반영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현재 한국교회에 구원론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해결한다. 이처럼 바울의 칭의론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야 칭의의 전 과정이 적절히 설명되고, 현존하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열릴 뿐 아니라 새 관점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다.

3. 기여와 한계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이나 현 바울 신학계의 논의 국면에 시의적절하게 등장했다고 판단된다.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작금의 칭의 논쟁 국면을 적절히 소개할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부패를 구원론 신학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이 가진 기여와 한계를 좀 더 언급하는 것이 향후 논의의 방향과 발전에 필요하다.

본서의 긍정적인 기여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본서는 한국개신교회가 가진 왜곡된 칭의론 이해를 적절히 비판한다. 저자는 개신교의 칭의론을 종종 구원파적 칭의론 식으로 설명하는 한국개신교회의 분위기를 강하게 지적한다. 구원파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도 구원파적 칭의론에 암암리에 편승하는 한국교회의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편승과정에 칭의를 과거 구원의 법정적 선언으로만 이해하고 이를 예정론과 부적절하게 조합하는 경향을 적절히 비판한다.

둘째, 저자는 또한 칭의가 윤리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변호한다. 김교수는 칭의와 성화는 같은 것을 말하는 다른 그림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칭의 구원은 윤리를 본질적으로 내포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구원의 서정’ 신학은 윤리를 강조하려면 (과거 구원인) 칭의의 다음 단계 즉 (현재 구원인) 성화를 강조했어야 하지만, 김교수의 칭의론은 칭의 자체가 윤리를 포함하기에, 칭의의 강조가 곧 윤리의 강조임을 말할 수 있게 한다.

셋째, 이런 주장은 자연히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이 가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전통적 칭의론에는 칭의를 강조하면 윤리가 약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이는 종교개혁시대에도 논쟁점으로 종종 나타났고, 이후 개신교 역사에서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계속 제기되었으며 새 관점과의 논쟁에서 극명하게 부각되었다(본서 1장). 김교수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의 논의를 적절히 소화하면서 전통적 칭의론의 장점을 변호하며 고수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종교개혁 전통의 좋은 점을 현대에 맞게 설명하며 변호한다.

넷째, 이런 과정에서 본서는 전통적 칭의 이해에 부족한 면을 적절히 채우려 한다. 저자는 칭의의 법정적 측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관계적 측면도 함께 고려한다. 특별히 ‘의’(義)를 언약적 측면에서 이해한 여러 성경학적 연구를 반영하여 칭의의 법정적 측면과 관계적 측면을 통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런 통합 시도는 새 관점과의 논쟁과 토론에서 얻게 된 통찰을 활용하면서, 전통적 칭의론의 장점을 잘 살리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연히 저자의 논지는 전통적 칭의론의 장점을 발전시키는 길에 도움을 준 셈이다.

다섯 째, 이 통합의 길에 저자는 칭의론과 하나님 나라 사상을 적절히 연결한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전통적 칭의론을 20세기 성경학의 하나님 나라 연구 결과와 지혜롭게 연결한 셈이다. 전통적 칭의론은 전통적 천국 이해와 종종 짝이 맞게 설명되었는데,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전통적 천국 이해를 대치하자 전통적 칭의론은 짝맞는 하나의 설명 방식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이런 국면에서 본서는 칭의론과 천국(하나님 나라)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연결되는 짝으로 보는 길을 제안한 셈이다. 바울서신과 복음서를 연결하여 설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을 제안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본서가 가진 한계는 또한 쉽게 간과될 수는 없다. 가장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전통적 칭의론의 개념과 틀 안에서만 현재 제기된 많은 문제와 이슈를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물론 본서는 전통적 칭의론 이해에 수정을 가하려 한다. 하지만 본서는 바울의 ‘의’와 ‘율법’과 ‘믿음’ 언어가 가진 신학적 구도와 설계 자체에 근본적 물음을 던지기보다 전통적 칭의론의 부족한 부분 몇 가지를 추가, 통합하려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마치 낡은 건물의 인테리어 내부 몇 가지를 리모델링하는 식이다.) 하지만 현대의 칭의 관련 논의는 그보다 더 큰 의문과, 더 넓은 영역을 고민하며 해결책을 찾도록 요구한다. 예컨대, 로마서 1:17이나 3:21-22의 논의는 전통적 칭의론만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이 두 곳의 ‘믿음’ 용어가 전통적인 개념의 믿음(즉, 신자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쉽게 단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의’ 용어도 ‘칭의’(의롭게 여김)로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본문은 ‘칭의’[稱義, 의롭게 여김]가 아니라 ‘의현’[義顯, 의가 나타남]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바울이 이 구절들에서 중점적으로 말하려는 바가 단순히 ‘신자가 의롭게 됨’(또는 ‘신자를 의롭게 함’)이라고 보는 시각에 일정부분 제동을 건다.

자연스레 두 번째 한계는 저자의 해결책이 칭의 환원주의에 빠진다는 점이 된다. 저자는 칭의와 성화 사이의 관계를 해결하는 부분이나 새 관점과 논의하는 부분에서 그 해결책을 칭의 개념의 확장에서 찾는다. 그는 바울서신의 이곳저곳에서 칭의와 부분적으로 연관되는 본문들이 모두 칭의를 강하게 대변하는 것처럼 논의한다. 하지만 그 구절들은 마찬가지로 다른 주제들과도 연관되기에 꼭 칭의 주제의 대변 구절로 설명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물론 저자는 다른 해석자들이 ‘원자주의’와 ‘실증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하지만(pp. 137, 151 등), 한편에서 보면 저자의 주장이 칭의 환원주의에 갇힌 셈이다. 그는 전통적 칭의론보다도 더 강하게 칭의 개념을 유지하려 하고, 자연히 전통적 칭의 개념을 더 확장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본서의 제목이 이런 틀을 잘 보여준다. 본서의 본제는 ‘칭의와 성화’이지만, 이를 서술하는 요약 부제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표현한 바울의 칭의론’이다. 저자는 칭의와 성화를 모두 칭의론 안에 넣고 본다는 말이다. 그가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는 아마도 1) 바울신학의 중심이 칭의이며, 2) 로마서의 중심 명제 또한 ‘칭의’라고 보는 전제 때문인 듯하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루터를 현대적으로 극복하려 했지만, 결국 루터에 묶인 셈이다. 라이트는 전통적 칭의 개념을 변경, 축소하려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면, 김교수는 필요이상으로 칭의 개념을 확장함으로 균형을 잃는다.

셋째, 따라서 본서의 이론은 논리적인 오류의 함정에 빠진다. 본서는 칭의와 성화를 규정할 때 칭의와 성화가 같은 실재를 말하는 다른 그림 언어라고 말하지만, 정작 성화를 칭의 안에 넣어 버린다. 다시 말해, 1) 한편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전체 속에서 강조점을 달리하여 어떤 국면을 보여주는 듯이 설명하면서도, 2) 다른 한편에서는 성화가 칭의의 부분집합인 것처럼 설명한다. 이 두 설명은 서로 논리적으로 충돌한다. 논리적 충돌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칭의가 또한 성화의 부분집합이라고 보는 길밖에 없다. A⊃B이고, A⊂B이면 A=B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것을 ‘성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칭의와 성화’의 주제를 (‘성화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굳이 ‘칭의론’으로만 설명해야 하는지 그 의문에 답해야 한다.

넷째, 저자의 논의 방식과 관련하여 또 중요하게 거론해야 하는 점은 저자가 ‘의’와 ‘율법’과 ‘믿음’을 논의하면서 ‘피스티스 크리스투’(pi,stij/ Cristou/) 이슈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1970년대 이후로 이 이슈는 바울신학계에 피할 수 없는 논쟁이고, ‘의’과 ‘율법’과 ‘믿음’ 주제 논의에 직결되어 있다. 더구나 ‘이신칭의’라는 주제를 다룰 때는 ‘피스티스 크리스투’ 형식을 어떻게 읽고 이해하느냐가 그 답변의 방향을 크게 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기에, 그 답변의 가치가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던과 라이트가 이 ‘피스티스 크리스투’ 논의에 직접 관여하면서 ‘율법’과 ‘의’ 문제에 답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본문 해석에 어려움이 일부 나타남도 고려해야 한다. 본서 자체가 본문을 석의하고 주해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글이 아니기에 여기에서 주해와 해석의 문제를 제기하기는 부적절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은 언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로마서 1:2-4을 설명하는 중에 2절의 ‘하나님의 아들’ 언급이 바울 것이지만 그 이후 3-4절 내용은 예루살렘교회의 신앙고백 인용이라고 말한다(p. 97). 하지만 과연 이런 판단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4절에도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가 등장할 뿐 아니라,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의 신앙고백 내용에 단순히 ‘하나님 아들’이란 자기 용어로 표제를 달았다고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바울이 자기 복음, 즉 ‘하나님 아들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예루살렘 사도 전통의 언어를 일부분 차용했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또한 고린도전서 3:5-15를 설명하는 데에도 논리적 어려움이 부분적으로 보인다. 저자는 한편으로는 3:14의 ‘상’이 사역자가 수고하여 이루어지는 거룩한 교회라고 적절히 이해하면서도(pp. 252-53, 255 등), 또 한편으로는 이 ‘상’이 사역자의 적절한 사역 모습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pp. 242, 255, 259 등). 이런 점 때문에 차등 상급론을 반대하는 저자의 논지가 적절하다고 판단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석적으로 무엇인가 매끄럽게 해결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나가는 말

본서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시의적절 했고, 여러모로 기여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의 부패 문제를 신학적 구원론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뜻깊은 저술이다. 또한 칭의와 성화의 신학적 자리를 재점검함으로 전통적 칭의론의 약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더구나 본서는 옛 관점과 새 관점의 논쟁이 격화되는 이때에 의미 있는 대안 추구의 시도로서도 가치가 있다. 양 진영의 논리에 갇혀, 서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치킨 게임식의 싸움이 아니라, 논의와 연구를 통해 적절한 통합 방식을 찾으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많은 과제가 남아 있고 갈 길이 멀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옛 관점-새 관점 논의나, 칭의-성화 논의에는 엄밀한 주석적-신학적 작업이 필요하다. 몇십 년 (길게는 몇백 년) 동안의 복잡한 논의 양상은 ‘의’와 ‘믿음’과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답이 필요하다는 점을 대변한다. 이 답은 단순히 한쪽 입장을 밀어붙이거나, 확장하거나, 또 한쪽 입장을 말소하거나, 축소하는 식의 단편적 방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보다 복합적 고려가 필요하고, 통합적 대안이 등장해야 한다. 그 대안의 자리에는 ‘믿음’(예컨대, 피스티스 크리스투) 논쟁과 ‘율법주의’ 논쟁이 ‘의’의 주제와 잘 어우러진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 본서는 그런 대안이 필요한 시대에, 그런 대안을 찾으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충분한 의미가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