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계 5월호]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원로목사

1939년 일제강점기에 평양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산정현교회에 출석, 평양 제10중학교에 다니다 전쟁 통에 이산가족이 된 김상복 목사. 20년 이상 미국서 목회 후 1990년 귀국, 할렐루야교회를 담임한 그는 은최 후인 지금도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과 세계복음주의연맹(WEA)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신앙계 5월호>가 그를 만났다.


현재 횃불트리니트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으로도 사역하고 계신데요. 요즘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지 근황을 말씀해주세요.

학교에 거의 매일 출근해서 필요한 일을 보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하루 종일에는 신은경 교수와 함께 CTS TV ‘7000미라클’ 녹음을 하고 금요일 오전에는 ‘오늘의 양식’을 녹음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시간들은 방문자들과 가끔 상담이 필요한 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주일에는 여러 교회의 설교 부탁을 받고 종종 목회자 세미나 등 강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은퇴 후 지난 몇 년 동안은 제 몸을 돌보기 위해 병원을 찾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평양이 고향이시고 어릴 적 산정현교회에도 다니셨는데, 일제 강점기와 해방이후 격동기를 겪으면서 어려움이 많으셨지요?

저희 가족이 다니던 평양 산정현교회는 순교자들을 많이 배출한 교회입니다. 해방 전 주기철 목사님 한 분이 순교하셨습니다.

해방 후 6.25전쟁까지 5년동안에는 북한 정권 아래에 김철훈 목사, 정일선 목사, 방계성 목사, 백인숙 전도사, 주기철 목사님의 장남 주영진 전도사와 그의 아내 등 여섯 명의 목회자들과 장로님들 가운데는 조만식, 유기선, 양재연 장로 등이 순교함으로 한 교회에서 열 명의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학생이었지만 학생들도 순교신앙에는 다름이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학생들도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저도 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 평양 시내 신사참배 거부를 했었습니다. 곧 이어진 북한 공산주의 정권이 시작된 후 주일성수 문제로 학생들은 퇴학, 출학, 체벌, 자아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도 주일문제 때문에 거의 매주 월요일이면 몽둥이로 심한 매를 맞거나 벌을 서거나 교무실에 불려가 야단을 맞거나 토요일 오후에는 우리 반 학생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받기도 하고 산에 끌려가 몰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죽도록 충서앟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너희에게 주리라”는 교훈과 또 “몸을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던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신앙을 배워 평생 그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와 제 어머니의 가르침이었습니다.

6.25때 9남매 중 5남매가 월남했고 부모님과 4남매가 남으셨다고 들었습니다. 86년에 헤어진 가족을 평양에서 만나셨는데 만나게 된 계기와 그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6.25 전쟁 중 평양 10중학교 1학년, 12살이었습니다.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상했다가 중공군의 투입으로 유엔군과 북한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1950년 12월 2일 아침 10시경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니까 형 두분과 누이가 보따리를 매거나 들고 어머니 앞에 서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형들과 누이가 피난을 가는가 보다 하고 옆에 섰더니 어머니께서 저를 쳐다보시다가 형에게 “얘도 데려가라”고 하셨습니다. 형이 저를 보며 “가자!” 해서 저는 서 있다가 돌아서서 두 형과 누이를 따라갔습니다.

결국 1986년 여름 다니엘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평양에 가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흰 치마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밖에 나와 저를 기다리시던 흰머리의 어머니를 다시 만나 80세 생신 축하상을 차려드렸습니다.

36년만의 재회였습니다. 너무 기뻐 울지 않고 웃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떠난 후 평양 대폭격 때 폭탄이 우리 집에 떨어져 돌아가셨고 제 여동생은 그 때 왼손을 하나 잃었습니다.

45년 목회 사역을 하시면서 가장 보람 있으셨던 사역은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나 집회를 통해 복음을 전했을 때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을 때가 가장 기뻤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목회의 모든 피곤이 사라졌습니다.

제 목회생활 중 두 번의 성전건축이 있었는데 미국 볼티모어 소재 벧엘교회를 개척하고 교회가 잘 성장해서 5만5천 평의 대지에 한국풍의 성전을 완성하고 헌당했을 때, 분당에 할렐루야 교회 새성전을 완공하고 은퇴하기 전 성전건축으로 인한 빚을 완전히 갚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을 느끼며 큰 기쁨과 감사와 보람이 있었습니다.

저의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먼저는 통일이 되는 것이고, 통일이 되면 제 모교회인 산정현교회를 재건하는 것입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한교회가 교단은 달라도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기뻐하며 축하함으로 영적인 통일을 철저히 인식하고 지켜야 합니다.

또한 남한교회가 북한복음화를 위한 통합적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언제 문이 열려도 북한을 계획적으로 질서 있게 복음화 할 백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 계획 없이 문이 갑자기 열리면 대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가정의 달 5월입니다. 끝으로 목사님께서 크리스천 가정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가정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성공적인 가정생활은 절대로 그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정생활은 꾸준히 배우고 실천해야 성숙해집니다. 좋은 신앙과 생활은 훈련의 결과입니다.

기독교 가정은 식구들이 결심하고 행복한 신앙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 훈련 받고 노력해서 기독교 가정들이 먼저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우리와 우리 가정들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어야 합니다. 좋은 가정을 이루지 못하면 교회에서 섬길 자격이 없습니다.

(인터뷰 기사 전문은 <신앙계 5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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