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MC소속 한국인 목사 노력 덕 … 아펜젤러 선교 130주년 맞아 의미


▲ 조선선교의 문을 연 아펜젤러 선교사의 생가가 미국 펜실베니아주 벅스카운티에 위치한 수더튼 지역에서 발견됐다. 이 기사의 사진은 베다니 한인연합감리교회의 박대성 목사가 제공했다.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선교사가 태어난 생가가 미국 펜실베니아주 벅스카운티에 위치한 수더튼 지역에서 발견됐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선을 찾은지 130주년이 되는 해에 의미있는 발견이어서 교계의 관심이 되고 있다. 그간 수더튼은 아펜젤러의 고향으로 익히 알려져 있었으나 생가는 확인이 안되고 있었다.

아펜젤러 생가 발견은 메릴랜드 주 엘리컷시티에서 목회하는 박대성 목사(베다니 한인연합감리교회)의 끈질긴 노력덕분이었다. 박목사는 3년전 아펜젤러가 다녔던 교회가 ‘임마누엘 라이디스 교회’라는 것을 확인하여 한국에 소개했는가 하면 기독교고서, 초기 미감리회자료들을 발굴하는 등 선교역사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는 UMC 한인 목사다.

    
▲ 자료를 보며 생가임을 확인하는 존 니더하우스 목사와 집주인 마커스 로젠버그, 그리고 박대성 목사

아펜젤러 생가, 펜실베니아주 수더튼에서 발견

아펜젤러의 생가는 아펜젤러의 고향교회(임마누엘 라이디스교회)에서 1~2k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로젠버그씨가 1957년에 구입하여 현재까지 60년 가까이 살고 있다는 이 집을 박목사는 지난 3월 26일 아펜젤러 고향교회의 니더하우스 목사와 이광풍, 김영민 목사 등 KMC소속의 목사들과 함께 방문했다.

고향교회의 현재 목사인 존 니더하우스 목사가 아펜젤러 가문에 대한 기록이 있는 책을 찾은 것이 이 집이 아펜젤러의 생가임을 확인하는 기점이 됐다. 에드워드 매튜스라는 사람이 1900년 초에 작성한 내용을 루이스가 재편집하여 1994년에 만든것으로 보이는 이 책에는 아펜젤러 가문에 대한 설명과 90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생가 사진이 흑백으로 수록되어 있고 아펜젤러 가족이 살았던 지역이 ‘힐타운’이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힐타운은 바로 생가가 있는 동네 이름이다. 이 책의 발견이 박목사가 생가를 찾을 수 있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집주인은 낯선 동양인들의 방문에 긴장하면서도 역사적 고증에 나선 방문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방문자들이 놀란 것은 집주인인 로젠버그 씨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아펜젤러의 생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980년 후반에 다니엘 데이비스라는 교수가 찾아와서 이 집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말해 주더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펜젤러 생가 발견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엄밀하게 한국에 소개된 것이 처음이고 복음을 전해 받은 한국 기독교가 아펜젤러를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올해는 아펜젤러 선교 130주년이 되는 해이고 우연의 일치로 아펜젤러가 조선에 들어왔던 4월 5일 부활절과 같은 날짜에 부활절을 맞아 의미를 더하고 있다.

박목사는 이 생가가 지어진 시점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매매문서나 등본, 주소 등이 남아 있는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외관상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벽돌 등이 오래된 건물임은 직관적으로 알수 있게 한다고 했다.

    
▲ 증축된 굴뚝 중앙에 이 집의 증축연대로 추정되는 '1860'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집주인에 따르면, 생가의 외관이 양식을 달리하고 시차도 느껴지는 두 건물이 덧붙여지는 형태로 증축된 건물인데 본채에 증축된 건물의 굴뚝 중앙에 증축연도로 보이는 ‘1860’이라는 숫자가 적힌 돌판이 붙어 있어서 본채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지어졌을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박대성 목사가 발견한 다른 증거에 의하면, 이 집은 아펜젤러의 할아버지가 1852년에 구입한 농장에 속해 있었고 부모가 1855년에 결혼하여 1858년에 이곳에서 아펜젤러를 낳았다고 했다.

아펜젤러의 형(Jacob G Appenzeller)의 부인, 즉 형수의 성이 Cope였고 아들을 두지 못한채 형이 1920년에 사망하자 처가가 이집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Cope 성씨를 가진 사람이 1957년까지 살다가 현재 주인에게 집을 팔았다는 것이다. 아펜젤러의 동생은 미혼 상태로 형보다 2년 일찍 사망하여 고향에는 대를 이을 남자가 없었던 것도 Cope 성을 가진 이가 그집에 살아야 했던 이유가 된다.

박목사는 집 매매문서나 등본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집주인의 증언과 건물형태, 아펜젤러의 가문의 가계도, 사망일시, 교회공동묘지 주변에 있는 가족묘비, 그리고 고증이 담겨있는 서적 등을 토대로 이 집이 아펜젤러의 생가였음을 확신했다. (반면 시청이나 카운티 오피스에 등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도 있어 추후 보강취재에 나설 계획이다-편집자 주)

    
▲ 오래되어 보이는 뒷편의 본채의 벽돌과 달리 앞에 증축된 사진상의 붉은 벽돌집의 벽돌은 얼핏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박목사가 가까이서 직접 만져본 결과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 아펜젤러 선교사 부모님 무덤(왼쪽 아버지 기드온 아펜젤러, 오른쪽 어머니 머리 아펜젤러) 이 주위에 자녀들 무덤이 있다.

이번 생가의 발견에는 다소 우연이 따랐다. 아펜젤러의 고향 교회가 있다면 그 지역에 생가가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 집터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과 막연한 기대를 하며 수소문 하던 중 최근 무덤찾기 사이트에서 우연히 아펜젤러 부모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 생가 발견에 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무덤찾기 사이트에 아펜젤러 부모 이름을 올렸다는 고향교회의 한 교인도 이 묘지가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아펜젤러와 관련이 있을줄은 몰랐다고 한다. 교회에서 200여미터 떨어진 교회소유 공동묘지의 오래된 한 묘비에 적힌 이름을 아무 생각없이 올렸을 뿐이었던 것이다.

고향교회에서 20년 넘게 목회한 니더하우스(John H. C. Niederhaus)목사 조차도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가 아펜젤러의 고향교회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된 것을 보면 아펜젤러의 고향에서, 그리고 그의 나라에서 그의 존재는 잊혀졌거나 우리들에게 만큼 소중히 여져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모와 형제들의 무덤은 모두 있는 반면 이역만리 한국에서 순직한 그의 무덤은 이곳에 없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어서 씁쓸함을 더한다.

박대성 목사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를 뒤돌아보자는 의미”라면서 “선교 열정으로 미지의 나라에서 희생하고 헌신한 아펜젤러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도 지금 이시대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 좌로부터 생가확인 방문길에 오른 김영민 목사, 이광풍 목사, 마커스 로젠버그(현 집주인), 존 니더하우스 목사아펜젤러 선교사 고향교회 담임), 김행현 집사, 박대성 목사
    
▲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농부였던 기드온 아펜젤러, 머리 아펜젤러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 지역에서 보내고 프랭크린ㆍ마샬대학과 드루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885년 4월 5일에 조선 선교를 위해 인천에 도착하여 한국 기독교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아펜젤러 생가를 발견한 박목사는 <감리회선교131주년-아펜젤러, 스크랜턴 내한 130주년/광복70주년>을 맞아 가우처의 일기를 가지고 한국을 방문한다. 이미 3차례에 걸쳐 아펜젤러의 유물과 유품, 초기 기독교 감리교 유물 등 수백 점이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에 기증되도록 도운 박목사가 이번엔 가우처의 일기를 기증하도록 볼티모어-워싱턴 연회 역사위원회 건의하여 승인을 받아 국내로 가지고 오는 것이다. 이 일기는 그의 첫 번 조선 방문이었던 1907년 6월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외에도 대관형식으로 오는 8월까지 이어질 전시회를 위해 가우처가 쓰던 중절모, 찬송가, 휴대용 성찬기, 여권, 딕킨슨대학 다닐 때 쓰시던 히브리어 희랍어 노트 두권, 여러 사진들, 일본황제와 중국에서 받은 훈장, 당시 기사들, 편지, 그리고 기증되는 일기 외의 다른 일기들 등 20~30점을 가지고 온다. 몇몇 물품은 기증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우처는 1883년 9월 고종황제가 파견한 보빙사절단의 민영익을 기차안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한국선교에 뜻을 세우고 1884년 맥클레이를 조선에 보내 고종 황제로부터 학교와 병원사역을 윤허받으며 조선선교의 문을 연 인물이다. 6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하며 배재학당 이화학당 설립과 운영을 지원하는 등 조선의 기독교 선교와 고등교육의 모태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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