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전 교수 '신학 칼럼' (16)

온 나라가 절규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린 생명들이 300명 가깝게 타고 있는 배가 침몰했다.구조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면서 생사를 몰라 산자들이 절규하고 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국민들 또한 같은 심정이다.

거대한 배지만 너른 바다에서 침몰하는 모습은 그저 한낮 작은 장난감 같을 뿐이었다. 그 안에는 꽃다운 아이들이 빠져나오지 못한 채 갇혀있다.

현재로서는 그들의 생사를 알 수 없다. 벌써 한 주간이나 지났으니 이젠 절망감만이 엄습해오고 두렵기까지 하다.

아이들은 침몰하는 순간까지 안내방송을 따라서 선실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구출할 사람은 어디도 없었다. 선장과 승무원들은 이미 배를 탈출한 상태니 선실에 있는 아이들은 버려진 것이었다. 아이들은 공포 속에서도 선실에 있으라 하니 그대로 있었고 정작 다음 행동을 지시해야 할 승무원들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방치된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세월호는 급격히 기울어지면서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승선한 인원의 1/3정도만 구조가 되었고 나머지 2/3는 배와 함께 수장을 당했다. 아직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비록 바다 속이지만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원할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경험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이다. 구조를 위해서 총력을 다 하고, 장비나 인력도 총동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구조는 단 한 명도 하지 못한 채 시신만 수습하고 있는 것이 전부다. 인력과 장비가 있다한들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으니 무용지물이다.

인력과 기술, 장비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모든 조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일정한 조건이 만들어져서 사용할 수 있을 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사고현장의 환경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최첨단의 기계도, 사고선박을 통째로 들어 올릴 수 있는 크레인일지라도 사용할 수 있는 현장조건이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러니 구조인력들은 도구를 손에 들고도 사용하지 못한 채 그들도 발을 구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과 국민들은 원성이 높다. 사고원인과 구조과정의 허점들, 대처능력의 한계 등과 겹치면서 시간은 무심히 지나고 있으니 원성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는 세월호를 완전히 삼킨 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수면 위에는 바닷물이 덥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들물과 날물이 오갈 뿐이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무표정한 바다가 원망스럽다. 오열하는 가족들과 절망하고 있는 국민들을 봐서라도 지나는 파도라도 가라앉은 배를 밀어 올려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하다.

현실 앞에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기에 앞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게 된다. 연일 동원된 장비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침몰지점의 정경은 타들어가는 속만큼이나 복잡하다. 하지만 모든 첨단 장비를 동원해서 수색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정작 성과는 없다. 그러한 장면을 보면서 스스로에 대한 한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평소에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을 자만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과학과 기술능력을 의지하여 자만하지 않았는지. 최첨단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미화하지 않았는지. 어떤 기술도 작은 파도 앞에서조차 무용한 것을 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허구였는지도 깨닫게 된다. 전해지는 화면 앞에서 인간의 모습이 참 작다는 것 말고 느껴지는 것이 없다.

생업을 포기한 채 사고현장에서 애통하고 있는 가족들이 안타깝고 아프다.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해소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되는 것이 없다. 뭔가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 같다. 외국의 전문가를 불러서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누가 온들 주어진 환경은 다르지 않지 않은가.

구조가 늦어지면서 사실상 수습으로 전환하는 분위기다. 따라서 승무원들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별히 선장에 대한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작 배를 운영하는 승무원들은 모두 생존했기 때문이다.

배를 끝까지 지키면서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구조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제일 먼저 퇴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가 거세지고 있다. 그것은 선장과 승무원의 기본적인 의무와 도리인데 말이다.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의 역할로 그 많은 학생들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비록 자신에게 닥쳐오는 두려움이 있다하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정황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승무원들의 어이없는 행동에 분노하게 된다.

이것은 특별한 사건에서만이 아니다. 일상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이 가정, 사회, 국가로 이어지는 전체가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기본이다. 배라고 하는 제한된 공간에서 승무원들의 역할과 책임은 승선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담보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책임을 저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온 국민이 참담한 심정으로 분노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하지만 그 책임의 의미가 무엇인가? 공허한 메아리만 있을 뿐 아니겠는가. 그들의 아픔조차 함께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기에 아프다.  그리고 혹이라도 남은 자들이 살아오기를 소원할 뿐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