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전 교수 ‘신학 칼럼’ (12)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주님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대인들을 향해서 했던 ‘들음’에 대한 교훈이다.  

이때 “귀 있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신체적 장애가 없는 자, 즉 귀의 기능이 정상적인 자를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때 “귀 있는 자”는 들을 귀, 즉 사실을 사실로 들을 수 있는 귀, 진리를 진리로 들을 수 있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직접적인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이 없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의 귀’ 즉 믿음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 만일 이 귀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듣지 못한다면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말씀에 대한 기쁨과 순종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그 귀가 준비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아서 안타깝다. 주님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를 반복해서 외치셨는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버거워하는 현실에서 과연 목회자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떤 말로 신자들의 귀에 충족감을 줄 수 있을 것인지. 그러다보니 목회자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실용적이고 당장 부담없이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한 말씀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서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하게 될 때 비로소 들음에 대한 반응을 하게 된다. 태어나서 자라는 아이는 제일 먼저 엄마를 인식하게 되고, 처음으로 하게 되는 말도 ‘엄마’라는 말이다. 왜 일까?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듣는 말이 ‘엄마’ 이기 때문이고, 가장 먼저 인식의 대상도 엄마이기 때문이다. 아마 ‘들음’을 통해서 반응하게 되는 원리를 증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예일 것이다.

즉 아이는 제일 먼저 자신의 눈앞에서 보이는 사람을 익히게 되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배우게 된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그 아이는 엄마라는 말을 모를 수 있고, ‘엄마’라는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이가 제일 먼저 듣고 배우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무엇을 듣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의식을 형성시키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전혀 아무런 말을 듣지 못하고 살았다면 그 사람은 말을 할 수 없고, 그와 함께 그 사람의 의식은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예외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기가 어려울 것이다.

한 사회를 형성하여 그 공간에서 함께하는 인간은 들음을 통해서 학습하게 되고, 학습의 과정에서 깨달음을 동반한다. 민족이나 혈통과 관계없이 그가 태어나서 처음부터 반복해서 들었던 말(언어)을 배우게 되고, 그것이 그의 모국어가 되는 것은 들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 그리고 그에게 형성되는 가치관은 그가 태어나서 어떤 말을 반복해서 듣느냐 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동시에 세계관과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이기에 그가 익히는 언어와 함께 가치관이 형성된다.

그리스도인은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그 언어에 담긴 신앙과 가치관을 이해하고 수용하게 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은 사람의 인격과 사상은 물론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에 의미화의 근본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할지라도 과학 자체가 인간의 삶이나 행함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며, 그 의식은 그 사람의 종교(신앙)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시대와 지역, 민족, 언어, 피부색과 관계없이 종교가 문화와 가치관의 근본이 된 것을 인류문화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만큼 종교가 인간의 의식과 문화를 형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다고 할지라도 과학자체가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과학은 인간에게 도구로서의 기능을 할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사람의 신앙이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을 결정하는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필요성은 더 분명해진다. 무엇을 들을 것인가? 얼마나 어떻게 들을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신앙과 함께 삶을 결정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고 의식적으로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들어야 할 소리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신중하게 살펴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들어야 소리가 너무 많다. 신앙과 관련해서도 저마다 주장하는 소리가 다르고 많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떤 소리가 참인지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다. 따라서 요즘은 들려오는 소리를 구별할 수 있는 판단력도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바른 모습을 만들지 못하며,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듣기를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랜 동안 신앙으로 살아 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외적으로 그리스도인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자신의 존재의미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찾지 못한 채 방황하거나 이기적인 자기만족에 의해서 사는 종교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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