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이유

작년 이 무렵 유럽지방 신년성회 개최지인 로마에 답사를 갔을 때의 일 입니다.

마침 성탄절을 얼마 앞 둔 시점이라 예수님의 구유(Krippe)가 있다고 전해지는 산타 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을 지방임원 목사님들과 방문을 하였습니다.

이 성당은 성베드로대성당(San Pietro in Vaticano),  성요한대성당(San Giovanni in
Laterano), 성바울대성당(San Paolo fuori le Mura)과 함께 중세시대 순례자들이 로마를 방문하면 반드시 참배하는 로마 4대 대성당(Patriarchalbasiliken)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구유와 더불어 복음서기자 누가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성모상(Icona della Madonna) 등이 이 성당이 보유한 주요 성유물입니다.

이러한 성유물 수집은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어머니 헬레나황후의 믿음과 권력으로 가능했다고 합니다.

바실리카(교회당) 정면에 있는 발다키노(제단덮개)아래에 내려가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한 은장식으로 이루어진 말구유를 볼 수 있는데 베들레헴에서 가져온 몇 개의 나무조각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은세공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구유를 앞에 두고 동행한 네 분의 목사님들 중에 두 분은 구유인 줄 알아보는데 두 분은 끝내 구유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참 설명을 하니까 비로소 ‘구유’ 같이 보인다고 합니다.

구유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런 일이 왜 벌어진 것입니까?

마굿간에 놓인 초라한 나뭇조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고 여겼던 구유가 너무 화려하고 세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잔잔한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말구유가 너무 화려하고 부유하면 말구유가 아니듯이 교회가 너무 화려하고 부유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아무리 자신이 교회라고 해도 이 세상이 교회인줄 알아보지를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들이 아무리 자신이 목사라고 해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말구유가 아니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세상은 우리를 알아보지를 못 합니다.

며칠 전 런던지역 구역회 개회예배에서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준회원전도사님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지 유럽에 나와 힘든 여건 속에서 사역하는 교역자들은 말구유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어려운 환경을 수치와 모욕으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감사와 긍지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은 <기독교뉴스>에도 함께 실렸음을 알려드립니다.)

▲ 로마 산타 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 대성당의 은세공으로 장식되어 있는 구유 ⓒ 임재훈

▲ 로마 산타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 내부 ⓒ 임재훈

▲ 로마 산타 마리아 마죠제 대성당, 성모상 이콘 ⓒ 임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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