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전 교수 '신학 칼럼' (3)

며칠 전 일본의 한 지인이 방문했다. 꼭 15년 만의 만남이었다. 공항에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해서 한참이나 찾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가 50대에 마지막 본 후 이제 70세가 넘었으니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역시 나를 알아보지 못해서 서로를 지나치기를 몇 번이나 하고서야 미심적어 다가가서 물어야 했다.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멋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한국방문은 처음이 아니지만 실로 오랜만이다. 17년 전에 다녀간 것이 마지막이었고, 내가 일본을 방문해서 마지막으로 본 것이 15년 전이다.

세월이 꽤나 지났으니 서로를 확인하면서 시간 앞에서의 인간의 한계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래서인가, 서로의 모습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몰라볼 만큼 변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미 전화상으로 그가 한국에 방문하는 목적을 내게 말했고, 그의 목적과 일정에 따라서 안내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 부부를 픽업하여 내처 고속도로를 달려 충청북도 영동으로 향했다. 영동의 황간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겨우 식당을 찾아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 여행의 목적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다. 물론 이미 전화상으로 대충 알고 있었지만 전화로 나누지 못한 자세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70세가 넘기까지 자신의 마음에 담아두었던 곳을 꼭 찾아보고 싶었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긴 세월동안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었던 풀어야 하는 숙제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의 고향이 황간이라는 것이다. 그의 외가는 본래 일본의 큐슈였는데 1900년대 초 외조부가 한국으로 이주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조부가 터를 잡은 곳이 황간이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와 호적에 남겨진 주소만을 들고 그는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온 것이다.

늦은 밤에 도착했으니 산속 마을에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어려웠다. 겨우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 그 밤을 쉬고 일찍 일어나 숙소주변을 산책하는 것으로 아침을 열었다. 서둘러 아침식사를 하고 그의 어머니가 태어난 곳을 찾아 나섰다. 번지를 모르는 황간면 마산리라고 하는 주소를 들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머니가 살던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양조장을 했었기 때문이다.

황간의 토박이들은 옛 양조장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해서 쉽게 그의 외가의 옛집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양조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양조장 건물도 없어졌고 새로운 건물이 지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당시 양조장의 일부가 남아있었다. 발효실로 추정되는 건물과 사택이 거의 무너져가는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는 감격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왜 이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했다. 어머니가 별세한 후에야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집을 찾았건만 그의 마음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한 모양이다. 그는 한참이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그만의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얼마를 돌아보았는가. 양조장을 구입해서 새로운 건물을 짓고 현재는 건재상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이 기꺼이 안으로 불러들여서 따듯한 차라도 한잔 하고 가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못이기는 척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양조장과 관련한 뒷날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앉았을까.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 아쉬웠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감격과 아쉬움을 동시에 토로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부인과 한국에 와서 어머니가 태어난 집을 찾아보고 느끼는 감정은 그만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것은 내게도 전해졌다. 그것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본향에 대한 동경심이 있는 게다. 비록 자신의 고향이 아닌 어머니의 고향임에도 그곳을 보고 싶어서 찾아온 그의 모습은 어쩌면 모든 인간의 그것이 아닐까.

그가 그곳을 떠나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못내 무엇인가를 남겨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쉽게 돌아서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어머니가 태어난 집을 나서는 그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제는 그도 70이 넘었으니 본향에 대한 생각이 더 간절했던 것일까. 그래서 어머니조차 찾아오지 못했던 그곳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 아닐까.

어머니가 태어난, 이제는 무너져가는 초라한 집의 문지방을 나서던 그의 뒷모에서 본향을 향한 깊은 향수(鄕愁)가 지금도 느껴진다. 인간은 과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성경은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왔다가 지으신 이인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고, 그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데 그 본향을 알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방황하는 인생이 아니런가. 본향을 향한 그리움을 마음에 품고, 본향을 여행하는 기쁨을 그리며 살 수 있다면 비록 미완의 인생이지만 하루하루가 아름답지 않겠는가.

오늘도 영원한 본향을 그리며 살고 싶은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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